– 일하던 시절, 마음속에 먼저 지어진 집. (6장)
1993년, 우리 집이 생겼다
1993년은
내 인생에서 오래도록 빛을 잃지 않는 해였다.
그해, 나는 아이를 가졌고
우리 집이 당첨되었다.
두 소식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거의 같은 시기에 찾아왔다.
그전까지 우리의 삶은
늘 ‘머무는 삶’에 가까웠다.
전셋집을 옮겨 다니며
짐을 줄이고,
마음을 줄이며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아이를 품고 나서야 알았다.
이제는 떠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돌아와야 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집이 필요했다.
일산 신도시에 분양 소식이 있었고,
우리는 가진 형편 안에서
가장 성실한 선택을 했다.
청약 통장을 꺼내 들고
계산기를 두드리며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숫자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1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일산 후곡마을 현대아파트
27평형에 당첨되었다.
그 종이를 받아 들고도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 집을 갖게 되다니.
그때부터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공사 현장에 갔다.
아직 아파트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한,
철근과 콘크리트만
앙상하게 서 있던 자리였다.
멀찍이 떨어져 서서
우리 동이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고,
‘저쯤이 우리 집이겠지’ 하며
한참을 바라보곤 했다.
층이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우리의 기대도
조용히 함께 올라갔다.
아직 들어갈 수도 없는 공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곳은
이미 우리 집 같았다.
집은 그렇게
먼저 마음속에서부터
지어지고 있었다.
그즈음 세상도
아주 느리게 변하고 있었다.
기혼 여성이
계속 일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한 일’로 말해지기 시작했고,
법과 제도는
뒤늦게 그 말을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몸담고 있던 K 항공 역시
그 흐름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기혼 여승무원의 비행은
비공식적인 예외가 아니라
제도로서 허용되었다.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많은 이들이
비로소 결혼을 선택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눈치를 보며
기혼 여승무원으로 비행을 하고 있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제도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고,
산전산후 휴가 역시
공식적으로 인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제도가 공식화되었고,
기혼 여승무원의 비행과 함께
임신과 출산, 육아휴직이
무급이지만 제도로 허용되었다.
나는 그와 동시에
산전산후휴가와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급여는 없었지만
직장은 남아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안도했다.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그 안정감이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그 즈음,
기다리던 우리 집이 완공되었다.
처음 그 집의 문을 열던 날,
아직 아무의 손도 타지 않은
새집 냄새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나왔다.
막 마른 페인트와
새 나무의 기운이 섞인 공기였다.
하얀 벽과 반듯한 바닥,
텅 빈 거실 한가운데로
오후의 햇빛이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이 집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은 7층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신도시의 길들이
정돈된 선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막 심은 나무들은
아직 그늘을 만들지 못했고,
넓은 도로 위로는
바람만이 먼저 다니고 있었다.
깨끗하지만
조금은 어색한 풍경.
모든 것이 준비는 되었지만
아직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은 시간.
나는 한참을 서서
그 빛을 바라보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했다.
아,
여기서 오래 살겠구나.
여기서 아이를 키우겠구나.
그리고
처음으로 그 말을
입 밖에 냈다.
“우리 집이네.”
그 말에는
기대와 안도가
함께 들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떠돌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서
오래 머물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집이
‘오래 살 집’이 아니라
‘오래 기억될 집’이 될 줄은.
다만 분명한 것은,
그날 이후로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돌아갈 곳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이 글은 한 사람이 임신과 출산, 일과 삶의 선택을 동시에 마주하던 시기를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떠날 수 있는 삶에서 돌아올 수 있는 삶으로 옮겨가던 순간들, 그리고 개인의 선택이 제도로 이어지던 시간을 담담하게 남기고자 했습니다. 집이 생기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유지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안도가 되었는지를 돌아보며, 그 시절을 조용히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