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교를 숫자로 하던 시절. (8장)
1993년 봄,
휴직을 했다고 해서 삶이 느슨해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더 바빠졌다.
수입은 끊겼고,
집에는 들어갈 돈이 계속 필요했고,
엄마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장사를 시작했다.
엄마 집 근처 지하상가에 작은 슈퍼마켓 자리가 났다.
환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자리였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나는 그 가게를 맡았다.
그리고 엄마를 고용했다.
엄마에게는 일이 필요했고,
나에게는 수입이 필요했다.
우리는 가게를 다시 손봤다.
진열대를 정리하고, 페인트를 밝게 칠하고,
오래된 분위기를 걷어냈다.
그리고 나름의 판촉 방식을 고민했다.
5000원마다 스티커를 한 장씩 주고,
50장을 모으면 휴지나 식용유를 사은품으로 주었다.
젊은 신혼부부들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유아용품 할인행사를 하고,
생활잡화도 전면에 배치했다.
쌈직한 숙녀복과 아동복도 들이고,
플라스틱 생활용품도 들여 놓았다.
생각보다 반응은 빨리 왔다.
지하슈퍼에는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찾기 시작했고,
계산대 앞에는 익숙한 단골 고객들이 생겼다.
일은 고되었고,
나는 임신 중이었다.
다행히 입덧은 심하지 않았고
몸도 아직은 견딜 만했다.
나는 뭐든 잘 먹었고, 뭐든 열심히 해냈다.
그 시절의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슈퍼마켓에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상품을 검수하고, 진열하고,
가게를 청소하고, 물건을 계산하고, 흥정하고, 발주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유통업 판촉사원으로 일했던 경험이
그곳에서 힘을 발휘했다.
나는 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태교를 숫자로 했다.
새벽이면 남대문과 동대문 평화시장에 나갔다.
옷과 플라스틱, 일용잡화를 떼어 와
가게에 펼쳐 놓고 직접 진열했다.
손글씨로 ‘상품 입점’ 안내를 써 붙이면
그 물건들은 곧잘 팔려 나갔다.
엄마는 손님을 맞았고,
나는 가게의 모든 일을 책임졌다.
엄마가 웃으며 일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가게는 생각보다 잘 되었다.
해가 질 때쯤이면 계산대 서랍을 열어
그날의 매출을 조용히 확인했다.
그 수입으로 엄마의 생활비가 해결되었고,
우리 집 살림이 돌아갔고,
아파트 중도금도 낼 수 있었다.
남편은 회사 일을 마치고
지친 기색 없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함께했다.
시청역 근처 회사에서 가게가 있던 안산까지,
하루 세 시간이 넘는 출퇴근을 하면서도
그는 묵묵히 우리 곁을 지켰다.
우리는 1년 365일 쉬지 않고 가게를 지켰다.
임신 열 달 내내, 나는 쉬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나는 강했다기보다
멈출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아이를 품은 몸으로,
엄마와 함께 웃으며 가게 불을 켜고 끄던 시간.
그때는 몰랐다.
그 시간들이 훗날까지 나를 지탱해 줄 줄은.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지하 슈퍼마켓에서의 시간이
나에게 ‘엄마’와 ‘노동’과 ‘삶’이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한가한 시간에는 엄마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엄마를 ‘엄마’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아이를 기다리는 딸이었고,
엄마는 그 딸을 돕고 싶은 엄마였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그 가게를 지켜냈다.
그곳은 밝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곳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가장 절실한 자리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 지하 슈퍼마켓은
단순한 장사의 공간이 아니라
엄마와 내가 함께 버텨낸 시간의 자리였다.
이 장은 쉬고 있었지만, 삶만큼은 가장 치열했던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임신 중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고, 엄마와 함께 지하 슈퍼마켓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노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을,
그리고 엄마와 딸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돌아켜보면, 저는 그 시절 태교를 숫자로 하며
아이와 엄마, 그리고 제 삶을 동시에 붙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