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편 소설 초고를 다 썼는데...

근데 이제 뭐함?

by 천비단



전역한 뒤로 게임, 유튜브, 독서, 글쓰기만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 초고를 다 썼다. 정확히 말하자면 추가 장면을 몇 개 더 써야 하지만, 몇천 자 안 되는 양이라서 퇴고할 때 쓰려고 한다.


장편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분량


입대 전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이었고, 군대에 들어가서는 4월부터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널널하게 잡으면 2년, 실질적으로 따지면 8개월에 걸쳐서 7만 자 가량의 글뭉치가 탄생했다.


마지막 온점을 찍고 나서 한참 동안 커서를 바라봤다. 정말 다 쓴 건가? 그다지 힘들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살면서 가장 긴 분량의 글을 썼는데, 너무 쉽고 무난하게 끝나서 허무할 정도였다. 프로그래머가 코드를 실행해봤는데 아무런 버그 없이 잘 돌아가는 모습을 목격한 류의 불안감도 쓸어닥쳤다. 내가 상상했던 ‘초고를 다 쓴 소설가의 심정’과 완벽히 정반대의 감정이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출판 계약을 맺지도 않았고, 소설 사이트에 업로드하지도 않았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채 소설을 써내려갔다. 이 따위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소설을 다 쓰고 싶다는 맹목적인 욕심에 부단히 타자를 두들겼다.


ㄹㅇ;;


한 마디로 아무 계획 없이 글을 썼다는 소리다. 나는 이 글을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 모든 글은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사생아가 되는 운명이라지만, 나는 벌써부터 이 글을 파양 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무얼 해야 하지. 공모전에 투고해야 하나? 출판사에 다짜고짜 메일을 보내야 하나? 나는 내 글을 상품화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나의 그 어떤 것도 상품화하는 데 실패한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글은 상품에 어울리는 글이 아니다. 나조차도 재미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고, 스토리는 지리멸렬하고, 제목부터 거부감이 든다. 참고로 나는 제목을 짓는 데 재주가 없다. 너저분하고, 질척거리기만 하는 소설이다.


퇴고를 하기도 귀찮다. 나는 퇴고를 끔찍이 귀찮아하는 인간이다. 퇴고가 중요하다는 건 안다. 헤밍웨이도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좋은 글을 쓰려면 퇴고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나는 퇴고하는 법을 모른다. 그저 멍청히 내가 배설한 글을 읽고 마음 내키는 대로 지웠다 썼다를 반복한다. 원칙이나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띄는 진전도 없다 보니, 자연스레 퇴고를 귀찮아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나는 이렇게 긴 글을 쓴 게 처음이다. 평소처럼 단어 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서 사전을 1시간씩 뒤적거리다간 퇴고만 3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 상상만 해도 의욕이 떨어진다. 하늘은 내게 글을 싸고픈 욕심만 주고, 글을 성찰할 겸손은 주지 않았다. 그냥 챗gpt한테 맡길까도 고민 중이다.




여하튼 나는 한동안 소설을 내팽개치고 게임만 할 것이다. 챗gpt가 일주일 정도는 글에서 멀어지라고 조언해주었다. 내 나태함을 훈계하는데 급급하던 의사보다 AI가 훨 낫다. 인간은 참으로 형편없는 족속이다.



사실상 이 소설을 쓰도록 나를 몰아친 문장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인스타그램 유행의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