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비단 Mar 04. 2024

우울증 수기를 쓰고 더 우울해졌다

우울증 수기 쓰기를 그만둔 이유

 나는 2021년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울증 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할 때 우울증에 관한 글을 주로 쓰겠다고 한 게 기억난다. 말 나온 김에 브런치 작가 신청글이나 다시 읽어볼까?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

 “아마도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점 등 제 삶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어떤 생각으로 이딴 글을 썼는지 낯짝도 두껍다. 아무래도 나는 자기소개서처럼 자신을 철저하게 속여야 하는 글을 쓰는 데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왜 브런치에 우울증 수기를 쓰기로 한 걸까? 그 이유는 어딘가에서 수기를 쓰는 게 우울증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들어서였다. 한창 우울증에 대한 정보를 찾을 때 본 것으로 기억한다. 인터넷에 ‘우울증 극복하는 방법’을 검색하면 나오는 것들. 사람을 만나세요, 운동을 하세요, 산책을 하세요, 취미를 가지세요 등등. 그중에서 가장 끌리는 게 글쓰기였다. 글이라면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는 아니어도 계속 써왔어서 나름 자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멋있어 보였다. 자신의 아픔을 덤덤하게 글로 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작가들이 멋져 보였다. 자신의 치부를 글로써 드러내는 그들을 동경했다. 일종의 선망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도 우울증 수기를 쓰기로 했다. <마이 리틀 블루>라는 제목을 붙이고, 방에 처박혀 글을 쓰고, 몇 번이나 퇴고한 다음, 떨리는 손으로 업로드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좋아요 알람이 뜨고, 댓글을 적는 분들도 있었다. 내 상처를 인터넷에 공개했다는 치욕스러움과 그것으로 관심을 받아 생긴 떨림이 섞이며 묘한 흥분이 일었다.


 얼마 동안은 글을 쓰는 게 재미있었다. 의사 선생님에게나 했던 말을 인터넷에 업로드할 때마다 스릴감이 가슴을 쿵쿵 뛰게 했다.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서 많이 울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우울을 해소하는 걸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글을 쓰는 게 버거워졌다. 다음 글을 쓰기 위해 억지로 잊었던 옛 기억을 최선을 다해 꺼내야 했다.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놨던 상처를 뒤적이고, 무의식의 장막을 걷어서 내 눈앞에 전시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 당시의 기억과 감정이 생생하게 재생되었다. 식칼을 들고 있는 아빠, 어두운 아파트 단지에서 울고 있는 나, 커터칼을 만지작거리던 감촉.


 그뿐만이 아니라 그 피투성이 기억을 이리저리 볶아서 읽기 좋게 가공해야 했다. 퇴고를 반복하면서 수도 없이 기억을 끄집어내야 했다. 그건 마치 내 살을 조각칼로 깎아서 보기 좋게 다듬는 과정과도 같았다. 고통을 억지로 참고, 타인의 시선으로 감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했다.


 그때야 깨달았다. 아픈 기억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일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상처를 극복했거나,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것처럼 냉정하게 다룰 수 있는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때의 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에 불과했다. 내 상처를 담담하게 받아들일 정도의 위인도 아니고, 글을 자유자재로 쓰는 프로도 아니었다. 우울증 수기를 쓰면서 나는 점점 더 우울해져갔다.


 그래서 나는 우울증 수기를 유기했다. 누군가에게는 글을 쓰는 게 우울감을 극복하는 최고의 명약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오히려 증상을 더 악화시키는 독이었다. 이것이 2년 넘게 우울증 수기를 쓰지 않은 이유다. 알고 있다. 비겁한 변명이다.




 이제는 내 상처에 꽤나 덤덤해졌다. 갑자기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거나 우는 경우도 잘 없다. 아마도 이 상태라면 우울증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폴더에 3년 전에 쓰다만 글들이 먼지 쌓인 채 잠들어 있다. 이제 이것들을 하나씩 써야 하지 않을까. 무엇보다 브런치에게 우울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했으면서 안 쓰는 건 양심에 찔린다.


 글을 쓰는 것은 글을 빚지는 채무자가 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내가 언젠가 일기장에 적은 말이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마음먹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글을 써야만 한다. 글의 채무가 생기는 것이다. 글의 빚쟁이가 되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글쟁이는 슬픈 천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건 윤동주가 한 말이다.


 그러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비록 내가 한때 유기하고 외면했던 글이라 할지라도, 이 글을 쓰는 게 또다시 상처가 될지 모른다 해도 천천히 써나가고 싶다.


빈센트 반 고흐, <클리시의 봄낚시>, 1887
작가의 이전글 임용고시에 또 떨어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