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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Mar 11. 2024

딱지치기와 우유

냉정하고 차가운 승부의 세계


 나는 오른손을 입에 갖다 대고 입김을 하아 불었다. 그리고 하늘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잠시 기를 모은 후, 온 힘을 다해 내려쳤다. 내 손에 있던 것이 대포처럼 발사되었다. ‘짝!’ 소리와 함께 연두색과 주황색이 바닥에서 튀어올랐다.


 “넘어가라!”


 나는 간절히 외쳤다. 연두와 주황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덤블링하더니 툭 떨어졌다. 아이들의 탄성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나는 4살인가 5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녔다. 그 유치원에 대해 기억나는 거라곤 뚝딱이가 마스코트로 있던 사실밖에 없다. 티비에서 EBS를 틀면 무대 위에 뚝딱이와 번개맨이 나오고, 우리 유치원 이름이 왼쪽 위 로고에 떴다. 그 유치원과 그 어린이 프로그램이 무슨 관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EBS 대슨배님


 아침에 일어나 빌라 입구에 쭈그려 앉아 있으면, 유치원 차가 털털거리며 기어 왔다. 차에 올라타 선생님과 인사하고 자리에 앉으면 5분 만에 유치원에 도착했다. 유치원은 3층 정도 되는 높이였다. 3층 벽면 한 구석에 1층 놀이터로 바로 내려가는 미끄럼틀이 기억난다. 아마 화재가 일어났을 경우 어린이들을 빠르게 탈출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평소에 미끄럼틀 입구를 막아두어서 막상 화재가 일어나도 저 미끄럼틀을 제때 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굳이 선생님에게 따지진 않았지만.


 아침에 유치원에 도착하면 가장 처음으로 우유를 마셨다. 선생님이 서울우유 한 팩을 뜯어서, 반은 스댕컵에 따라서 주고, 나머지 반은 그대로 주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우유를 받아 쭉 들이켰다. 다 마시고서 스댕컵은 물로 행구어서 연보라색 빛이 가득한 상자에 집어넣었다.


급식실에 있는 그거


 나는 그때부터 한동안 우유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렇게 맛이 없는 액체를 키가 커야만 한다는 이유로 억지로 마셔야 한다니. 어린 아이에게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먹는 것보다 더한 고문이 있을까.




 유치원에서 배운 것은 흐릿하게나마 기억난다. 쬐끄만한 의자에 어린애들이 아기새처럼 쪼르르 앉고, 그 앞에 선생님이 서서 허공에 팔을 휘저어가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은 손의 명칭을 배웠다.


 선생님이 오른손을 번쩍 들고 “밥 먹는 손은 뭐라고 부를까요?”라고 말하니, 아이들이 “오른손이요!” 대답한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이 아는 지식이 나오면 그것을 티 내고 싶어서 안달이다.


 선생님이 이번에는 반대손을 들며 “그럼 이 손은 뭐라고 부를까요?” 하니 아이들이 “왼손이요!” 한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두 손을 번쩍 들며 “그럼 이 손은 뭐라고 부를까요?” 하니 아이들이 침묵한다.


 조용한 가운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혼자 대답했다. “양손이요.”


 선생님이 정답이라며 호들갑 떨었고, 아이들이 부러운 듯 탄성을 내질렀다.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지식을 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우월감. 나는 가슴을 한껏 펴고 우쭐거렸다. 그때 느낀 우월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유치원에서 덧셈 뺄셈이나 동요를 배우긴 했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유롭게 놀았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놀았냐. 바로 딱지치기다.


중고거래 사이트에 많이 보인다


 문방구에 가면 주인 아저씨가 자리를 지키는 카운터 앞에 형형색색의 딱지가 쌓여 있었다. 메이플스토리에 나오는 몬스터를 본떠 만든 고무딱지와 종이딱지였다.


 고무딱지는 한 면은 평평하고, 다른 면은 울퉁불퉁한 볼록판화처럼 되어 있다. 주황버섯 같은 허접한 몹은 작고, 크림슨발록 같은 보스몹은 주황버섯의 4-5배는 컸다. 죄다 주황색, 연두색, 노란색 형광색이었다. 어린이들의 시선을 훔치는데 형광색 만한 게 없나 보다.


가챠의 쓴맛을 처음 알려준 녀석...


 종이딱지는 동그랗고 두꺼운 종이에, 앞면에 몬스터 그림과 이름, 레벨 따위가 적혀 있고, 뒷면에 메이플스토리라는 글씨가 작은 폰트로 적혀 있었다. 전체적으로 병뚜껑 같이 볼록하게 생겨서, 뒷면으로 놓여 있는 딱지는 살짝만 내려쳐도 쉽게 뒤집을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이 딱지는 일종의 재산이자, 포커칩이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모은 딱지를 걸고 승부를 신청한다. 딱지가 뒤집히면, 승자가 그 딱지를 뺏어간다. 냉정하고 차가운 승부의 세계. 승부는 한쪽이 모든 딱지를 잃을 때까지 이어진다.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가져간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유치원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실력이 뛰어난 타짜는 딱지 케이스를 들고 다녔다. 작은 플라스틱 필통처럼 생긴 그것에 딱지가 빽빽이 차 있었다. 그 작은 세계에서 딱지가 가득한 케이스를 가진다는 것은 최상위의 권력을 상징했다.


쫄리면 뒤지시든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도전자가 모든 걸 잃고 스러져갔다. 언제는 모든 딱지를 뺏긴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그의 딱지는 그가 그동안 힘들게 모아 온 인생 그 자체였다. 어린 패기로 포식자에게 도전했다가 모조리 먹혀버렸다. 그 자리에 엎어져서 서럽게 엉엉 울었다. 승리한 챔피언은 그 모습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저기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는 아이는 단순히 얼라들 딱지 게임에서 패배한 게 아니다. 인생을 배운 것이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승자는 모든 것을 갖는다. 위너 테이크 올. 소년이여, 이 교훈을 가슴에 새기도록.




 초등학생이 되어 더이상 나와 딱지 쳐줄 아이가 남아 있지 않게 되어버렸을 때, 나는 서랍 속에 수북이 쌓인 딱지를 두 손으로 퍼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쉬운 마음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을 갖게 된 챔피언도, 최후에 다다르면 곁에 남아 있는 이 하나 없이 쓸쓸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딱지를 모조리 버린 그날, 딱지 하나에 울고 웃고 하던 아이도 함께 내 곁을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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