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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Jan 13. 2021

수영할 줄 몰라도 물에 빠지면 발버둥 쳐야지

게으른 우울증 환자의 하찮은 움직임

 글을 열심히 써봐야겠다고 다짐한 게 언제였던가. 아, 그래.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읽고 나서였지. 멋모르고 글 쓰는 게 내 천명이라고 멋대로 생각하고는 아무것도 모른 채 블로그에 글을 써재꼈지. 작은 노트북 하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방에 틀어박혀 문장을 뱉어냈지.


 생애 최초로 쓴 글은 언제였던가. 아, 그래. 중학교 2학년 겨울 노트에 시를 끄적이던 때였지. 선생님이 시키지 않고 내 자의로 처음 쓰는 글이자 처음 쓰는 시. 목적은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았지. 죽고 싶은, 죽고 싶은데 죽지 못하는 괴로움을 어찌할 수 없어서, 표지가 뜯겨 나갈 듯 너저분한 노트에 사비 연필 쥐고 괴로움을 써 내려갔지.


 처음 글을 읽은 기억은 언제였던가. 아, 그래. 초등학교 1학년 봄 선생님이 책을 읽어오래서 동화책 세 권을 샀더랬지.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드러누워 딱딱한 표지를 넘기고, 깜깜한 글씨는 읽는 둥 마는 둥 알록달록한 그림만 보고 덮었었지.


 옛날로, 더 옛날로 기억을 더듬거려보았다. 하지만 이 이후로는 떠오르는 게 없다. 8년의 기억이 소실되었다. 지금이 스물둘이니, 인생의 약 삼 분의 일이 검은 잉크로 뒤덮인 꼴이다. 이럴 때면 인간이 카세트테이프처럼 되감기 기능이 있다면, 아주 사소한 기억 하나하나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한다. 그런 상상은 대부분 비극으로 끝맺음한다.




 학교를 다니며 나는 평소처럼 우울증에 시달리며 살았다.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결국 쓰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게으름은 증상일까 천성일까. 이젠 분간이 가지 않는다. 어쩌면 우울증이란 구제불능 게으름뱅이가 만들어낸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대학생이 되고 두 번째 맞이한 겨울방학. 2년이란 시간을 대학교에 보낸 셈이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다. 나는 여전히 한심한 인간이었고, 한심한 짓만 골라 한다. 이제 시험도 끝났으니 글이라도 써야 하는데. 왜 글은 시험기간에 더 잘 써지는 걸까. 왜 시험이 끝나면 귀신같이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걸까. 기승전결에 기도 쓰지 못한 글들이 쌓여만 간다.


 변하고 싶다. 항상 변하고 싶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일을 하고, 원하는 글도 맘껏 쓰고, 원하는 책도 맘껏 읽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동안 여러 가지 수를 써보았으나, 제자리걸음이었다. 다짐 그리고 실패, 후회와 절망, 그리고 뒤따르는 체념....


 그동안 왜 변화에 실패했는지 생각했다. 내가 고안한 방법은 모두 강제성이 없었다. '방학 동안 전공 공부하기' '책 10권 읽기' 따위가 내가 나름대로 내놓은 대책이었지만, 강제성이 없으니 포기하고 놔버리는 게 너무나도 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강제성이 풍부한 방안을 마련했다. 스터디에 가입했다. 이제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공부를 해야 한다. 가족에게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다녀야 한다. 빡공단에 가입했다. 코딩 공부를 안 할 수 없게 되었다.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그 어떤 때보다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방학 내내 유튜브만 보다가 방학이 끝날 일은 없으니.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울감을 어느 정도 덜어주었다.


 노션이란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서 오늘 하루 종일 노션을 만졌다. 할 일 목록을 만들고, 프로젝트 표를 만들고, 읽을 책들을 정리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이제 노트북을 켤 때마다 노션이 자동으로 켜져 내가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켜준다. 이러면 해야 할 일에서 도망칠 확률이 줄어들겠지.


 이렇게까지 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인간이라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난 것을. 수영하는 법을 모르더라도,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발버둥 쳐야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빠져 죽을 뿐인데.




 그러던 와중 놀라운 소식. 브런치에 합격했다. 몇 년 전부터 작가 신청을 생각만 하다가 포기했었다. 그런데 충동적으로 작가 신청을 해버렸다.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는 메일이 스마트폰 알림 창에 떴을 때 순간 시신경에 문제가 생겼나 싶었다.


 발버둥이라 생각했던 내 행동이 결과로 나타나자 주체할 수 없이 기뻤다. 내가 쓴 글을 브런치 담당자분들이 읽고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될 자격이 있는 콘텐츠라고 인정해준 것 아닌가. 인정받는다는 기분을 오랜만에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오랜만에 기쁘다는 감정을 느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새벽 다섯 시에 눈물을 흘리며 삶을 비관하던 인간이 말이다.


 우울증을 팔아 합격했다는 꺼림칙한 기분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긴 하다. 그러나 이건 나를 심해 속으로 끌어당기려는 사악한 가짜 감정임을 안다. 나는 그 감정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아무 저항 없이 물속으로 가라앉아 익사하고픈 마음이 나를 지배한다. 그러나 나를 가라앉히려는 무게추 말고도 나를 수면 위로 떠올려주는 부력 또한 존재한다. 나는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소개를 하겠다. 사범대에 재학 중이며 중등교사를 꿈꾸는 인간이다.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았다. 최근 가족에게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앞으로 교육, 우울증, 책/영화 감상문 등의 주제로 글을 쓸 예정이다. '비단'은 부정문 앞에 붙는 '다만'이란 뜻을 지닌 부사이다. '천'은 그냥 비단이랑 가장 어울리는 성씨라 생각하여 갖다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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