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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g andy Dec 17. 2016

동티모르의 히딩크..희망에 대하여

김신환 감독과 맨발의 꿈

2005년 봄 어느 날, 그때 나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동티모르 수도 딜리로 가는 조그만 비행기 안에 있었다.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 김신환 감독의 인생유전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축구선수였던 김신환은 선수로 별 빛을  보지 못하고 프로에서 뛰는둥마는둥 하다 옷을 벗게 됐다. 이런저런 사업에 손을 댔지만 사기 등 하는 거마다 쫄딱 망했다.


일거리와 돈벌이를 찾아 흘러흘러 말그대로 이역만리 타국

동티모르까지 흘러가게 됐다.


바닷가에서 멍때리며 인도양을 바라보는 김신환의 눈에

다 낡은 축구공을 맨발로, 공을 따라 우르르 우르르 왔다갔다하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얌마, 공은 이렇게 차는 거야.' '전직'  축구 선수 출신의

오지랖 넓은 '참견질'.


그게 시작이었다. 모든 인연과 운명은 그렇게 '소소하게'

시작한다.


한두명씩 아이들이 몰려 들었고, 재미삼아 장난삼아

아이들에게 '공차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김신환은,


어느 날 보니 신생국 동티모르의 유소년 축구팀 감독이

돼 있었고,


또 어느 날 보니 그 아이들을 데리고 히로시마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에 출전, '우승' 이라는 믿기 힘든 결과를 냈다.


그게 뭐든 동티모르라는 이름으로 뭔가 '국제 대회' 에 출전한 것 자체도 처음인데, 거기다 우승이라니. 그것도 2회 연속 우승.


그렇게 김신환 감독은 동티모르의 국민적  영웅이 돼 있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곳에서의 희망


한국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김신환 감독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저렇게 디테일하게 듣진 못했다.


그저 동티모르 유소년 대표팀 감독이 한국인이라는데

완전 국민적 영웅이라 하더라. 정도만 흘려 들었다.


안그래도 엉덩이가 근질근질거리던 참이었는데  동티모르로 날아갔고, 색을 내자면 김신환 감독을

한국 방송에서 처음 소개한 사람이 나다.


이후 김신환 감독 스토리가 책으로도 나고 정재영 주연 '맨발의 꿈'으로도 영화화 됐으니,

김 감독의 인생에 나도 일정 지분은 있는 셈이다ㅎㅎ


사실 내 했던 일이, 좋은쪽으로든 나쁜쪽으로든, 타인의 삶과 운명에 영향을, 그것도 죽느냐 사느냐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업이라는 것을,


내가 가졌던 칼의 무게를 그때는 머리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가슴으로 느끼고 있는데,

후회나 아쉬움은 늘 그렇듯 너무 늦다.

 

암튼  해당 방송 마지막 장면 클로징은

대충 이랬던거 같다.


처음엔 이 아이들에게 김신환 감독이

희망이었습니다.


지금은 이 아이들이 김신환 감독에게,

동티모르에,


인도양의 석양만큼이나 아름다운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클로징 화면은 인도양 석양을 배경으로 깨벗고 노는 아이들, 공을 차는 아이들, 아이들을 바라보고 함께  뛰는 김신환 감독..


보통의 경우와 달리, 저 클로징을 쓸 땐 일말의 주저도 고민도 없었다. 그만큼 그날 인도양의 석양과 그 석양 속

사람들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십년도 전에 쓴 기사 클로징이 지금도 별 어려움없이

기억날만큼.


희망은 또다른 희망이 된다


동티모르는 사백년 넘게 포르투갈령으로 있다가 베트남 전쟁 종전 와중이던 1977년 인도네시아 군이 전격 침공, 자국령으로 삼았다.


이에 동티모르인들은 수십년 넘게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인도네시아 군은 이를 무력 진압,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한, 심지어 산채로 불태워지기까지 한, 80년 광주가 수십년 지속된  학살과 통곡의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총칼도 동티모르 사람들의 독립 열망을 꺽지  못했고, 마침내 2002년 독립을 쟁취해 낸 승리의 땅 이기도 하다.


내가 갔던 2005년은 신생국으로서 희망과 혼란함,

미래에 대한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난' 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북한보다 낮을만큼 세계 최빈국이었다.


길게 이어진 해변의 자연 풍광은 발리 저리 가라 할만큼 아름다웠지만,

 

'돈 있으면 여기 리조트나 하나 지으면 대박이겠다' 는 시덥잖은 생각이 절로 들만큼 정말 아무 것도 없이

허전했다.


띄엄띄엄 좌판에 물고기 몇마리 깔아놓고, 팔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초점 없는 눈빛으로 먼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년의 사내가,


물고기 주변의  파리도 쫒지않던 그 중년의 사내가

'동티모르' 같아 잔상이 오래 남았다.


유소년팀 현지 코치 집에 갔더니 마당에 조그만 무덤이 있었다. 뭐냐? 물었더니

태어난지 몇 달 안된 막내 아이 무덤 이란다.


약 한번 쓰지 못하고 죽게 둔게 가슴 아프다 했다.


서정주 싯구처럼 '가난은 한낱 남루'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경계짓고 있었다.


'피구'가 되고 싶은 아이들


그럼에도 아이들은 꿈을 꾸고 있었다.

축구 라는 꿈이었다.


히로시마 유소년 국제대회에서 mvp를 탄  아이의 집엘 갔더니 방에 포르투갈 축구선수 피구 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피구처럼 유럽 리그 축구선수가 돼 엄마아빠에게 집도 지어주고 동생들 공부도 시키고 해주고 싶단다.


그 아이들에게 축구는 그런 거였다. 자신과 집안의

미래와 행복이 걸린.


그 막연하고도 막연한 꿈을 희미하나마 보이고 손에 잡히는 꿈으로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김신환 감독이었다.


실제 김감독의 유소년팀 몇몇 아이들중엔 유럽 프로리그 유소년팀 관계자들이 문의를 해오는 경우가 있다 했다.


그래서 김 감독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운동장엔,

정말 많은 아이들이 찾아왔다.


덜그덕거리는 형 신발 신고 찾아온 예닐곱살 아이부터, 제법 키 큰 아이들, 콧물도 가시지 않은 대여섯살 여자아이까지...


이들에게 축구는, 유소년 대표팀은, 김신환 감독은 분명 '희망' 일 것이다.


실패한 축구선수, 쫄딱 망한 사업, 가족도 친구도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끝난 것 같은' 인생.


그 끝에서 동티모르 아이들을 만난 김신환 감독은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동티모르에 체계적인 축구 교육 시설을 짓는 거였다.

당시 수만평에 달하는 부지는 이미 수도 딜리 시장이 무상으로 제공한 상태였다.


'동티모르에 국가대표 축구팀이 생긴다면 그 첫번째 감독은 김신환 감독이 될것입니다'. 동티모르 체육부 장관의 말이었다.


그렇게 동티모르 아이들과 김신환 감독은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다.


불금을 보내고 지끈지끈한 머리로 잡아 튼 티비 리모콘을 타고 영화 채널에서 '맨발의 꿈' 을 하기에 문득 김신환 감독이 생각 나 몇자 적었다.


그때 그 아이들의 꿈과 희망은, 김신환 감독의 꿈과 희망은

여전히 진행중일까. 보고싶다.


바람결에 몇 마디 말을 전해듣긴 했지만 흘렸다.

새삼 옜날 인연들을 추억하는거 보니 늙나 보다. 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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