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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 Oct 21. 2018

미국에서 첫 번째 직업을 생각하다.

다양한 사실 정보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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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big-thinking/11


    대학원 1년(1기, 2기)은 '에너지 지정학' 관점에서 미국의 대외전략 변화를 알아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미국에 직접 가보고 싶다 생각했다. 미국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라'를 한번 쯤 가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그러나 여행으로 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고, 유학을 가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대학교 4년간 그랬듯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대외활동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나를 사로잡은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다. '한미대학생회의(Korea America Student Conference, KASC)'였다. (이하, KASC)


    KASC는 한국 / 미국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한국 또는 미국을 한 달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지원한 당시에는 한국 학생들이 미국으로 방문하는 해였다. 심지어 미국 서부, 중부, 동부를 모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다. 더구나 KASC는 '내 인생 마지막 대외활동'이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고, 1차 서류와 2차 인터뷰를 통해 최종합격했다.




    KASC로 미국에 방문해서 나는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묻고 많이 듣고 오자!'는 목표를 세웠다. 뉴스와 인터넷이 아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대학원 이후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은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였는데, 미국의 첫인상은 '두려움'이었다. 출입국 심사를 하는데 출입국 사무관이 나에게 왜 방문했는지, 얼마나 체류할 계획인지 등 날카로운 어투로 질문했다. 사실 나에게 질문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그 사람이 가진 분위기가 굉장히 싸늘했고,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미국은 흔히 '멜팅팟(Melting Pot)'이라고 불릴 만큼 수많은 인종이 사는 국가다. 그럼에도 아시아인인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조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참고로 나를 출입국 심사한 사람도 아시아계였다.)



'공유'


    이런 두려움이 놀라움으로 바뀐 계기는 차량공유업체인 '우버(Uber)'였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졌지만 당시 한국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KASC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대형 마트까지 이동을 해야 했는데, 미국은 우리나라처럼 대중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우버였다. 기숙사에서 나가기 전 앱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우버 드라이버가 승인하고 픽업을 온다. 택시는 아니지만 일반인이 개인 승용차를 통해 택시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공유경제'를 접한 순간이었다. 그 뒤에 '에어비엔비', '리프트' 등 다양한 공유경제 기반 기업이 미국에 있다는 걸 배웠다.



'소수자(마이너리티)'


    두 번째로 방문한 지역은 미국 중부에 있는 인디애나주였다. 나는 미국 중부를 '백인 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대학원 수업에서 미국 동부에 첫발을 내디딘 백인들이 골드러시 등으로 서부로 진출하던 중 미국 중부에 상당수 정착을 했다는 내용을 배웠기 때문이다. 수업 내용은 정확했다. 정말 작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거의 백인들이었다. 일정 중에 지역 은행과 박물관 등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속에서 정말 내가 '소수자(마이너리티)'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나는 KASC 일정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지만, 미국에 터전을 잡고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분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팩트'


    KASC의 마지막 방문지는 필라델피아, 워싱턴 그리고 뉴욕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국무부를 견학했던 워싱턴이었다. 그곳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국학을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기다린 순간이었다. 국무부 관계자는 뉴스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런 내용보다 더 세세한 내용이 궁금해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로 많은 전쟁물자를 한국에 수출하여 돈을 벌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면 그 기회는 사라지거나 대폭 줄어들 텐데 이런 상황에서도 한반도 평화를 미국이 정말로 원하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내 질문에 국무부 관계자는 '당연히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지금도 누구나 하는 '흔한 답변'을 했다.


    국무부라는 성격상 당연히 모호하게 답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당시에는 오바마 행정부 시기였다. 만약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국무부 관계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답변은 더욱 구체적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나는 오바마 대통령을 좋아하지만, 그의 대북 정책은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나는 미국 대선 당시 힐러리의 당선을 바란 사람이었다) 나는 미국 국무부에 방문한 후, 우리나라 뉴스에 나오는 미국의 입장이 팩트인지 그 너머에 다른 '진짜' 팩트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그렇게 미국에서 나는 '공유경제', '소수자(마이너티리)' 그리고 '팩트'라는 키워드를 배워왔다. 대학원 졸업반이었기 때문에 진로 설정에 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에 공유경제 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정보를 알리고 싶었고, 소수자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알리고 싶었다. 또한 이는 당연히 '팩트'를 기반으로 한 정보여야 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매일 다양한 뉴스를 공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읽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읽은 후, 중요하다고 여긴 기사를 올렸다. 당시에 나는 뉴스를 말 그대로 '읽기'만 했지, 뉴스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없었다. 이런 분석력과 판단력은 내가 취업 후에 업무 교육과 실무를 통해 기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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