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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Sep 19. 2023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5회 초


<머니볼>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야구 영화다. 영화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상당히 좋아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고난극복이라는 스포츠 영화의 전형적인 스토리라인을 어느 정도 따르고는 있지만 인간승리나 감동 같은 요소에 집착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영화다.


영화의 후반부. 시즌이 끝난 후 시카고 레드삭스의 구단주를 만나고 돌아온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빌리 빈 단장에게 부단장 피터 브랜드가 그의 제안을 수락했는지 묻는다. 빌리 빈의 반응은 쿨하다. 한 때 돈 때문에 진로를 바꾼 적이 있었어. 다신 안 그러기로 맹세했어. 얘기를 이어나가던 빌리 빈은 앞의 쿨하던 모습과는 달리 낫 쿨한 모습을 보인다. 그만큼 간절한 바람이었다는 뜻일 테다. 여기서 꼭 우승하고 싶었어. 대화는 계속된다. 이미 승리하셨어요. 우린 졌어. 피터 브랜드는 겉도는 대화를 이어가는 대신 빌리 빈에게 경기 영상 하나를 보여준다.


외야 멀리 공을 보내고도 좀처럼 2루로 뛰지 못하는 한 마이너리거. 어느 날 큼지막한 타구를 날리고 나서 마음먹고 1루 베이스를 지나 2루를 향하지만 1루 베이스를 지나자마자 넘어져 기어서 1루 베이스로 귀루한다. 그런데 수비수들의 반응이 특이하다. 웃으면서 이 주자를 바라보고만 있다. 피터 브랜드가 말한다. 이제 그는 깨달아요. 자기가 친 공이 펜스를 넘어 날아갔다는 걸. 홈런을 치고서도 그걸 몰랐던 거죠. 멋진 메타포다. 이 장면을 다시 돌려보고 난 빌리 빈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를 내뱉는다.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극 중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단장 빌리 빈은 2007년 포브스지에 의해 최고의 메이저리그 단장으로 선정된 실존 인물이다. 부단장 피터 브랜드 역시 실재하는 캐릭터로 LA 다저스 단장과 부사장을 지낸 폴 디포디스타가 그 역할의 모델이다. 빌리 빈이 단장에 오른 1999년 어슬레틱스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큰손 구단주가 사망하고 나서 평범한 스몰마켓 팀이 된 어슬레틱스는 팀을 이끌어갈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연봉이 많은 선수들은 차례로 팀에서 이탈하고 상대적으로 무게감이 떨어지는 선수로 그 자리를 메워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레드삭스의 구단주가 빌리 빈에게 말한다. 자넨 4천 백만 달러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어. 데이먼과 지암비, 이스링하우젠, 페냐를 보내고도 그들이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이겼지. 이긴 경기 수는 양키스와 똑같지만 양키스는 한 경기 이길 때마다 140만 달러를 썼고 자넨 겨우 26만 달러를 썼어. 실제 빌리 빈이 거둔 성과는 놀라웠다. 1999년부터 2006년까지 8년 동안 평균 .580의 승률을 기록하고 플레이오프 진출을 다섯 번 이뤄낸다. 2002년에는 아메리칸리그 신기록인 20연승을 거두기도 했다. 뛰어난 경기력을 보이는 팀은 언제든 있고 기록 역시 경신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리그 최하위권의 연봉 총액을 지출하고 이런 일을 이뤄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빌리 빈이 신기에 가까운 안목으로 저평가된 선수들을 발굴해 팀을 궤도에 올렸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단장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선수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는데 세이버메트릭스를 활용하고 자신의 선택에 의심을 품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갔기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스포츠계에서 그의 새로운 시도가 얼마나 많은 논란과 반발을 불러일으켰을지 짐작할 수 있는데 바깥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은 강건함이 오늘날의 그를 만든 것일 테다.


세이버메트릭스는 야구에 수학적, 통계학적 방법론을 도입해 선수의 가치를 유명세가 아닌 과학적이고 계량적으로 평가하는 이론이다. 세이버메트릭스의 역사는 1916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이것을 진정한 야구 분석학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사람이 세이버메트릭스의 대부라 불리는 빌 제임스다.


통조림 공장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빌 제임스는 야구를 지독히 좋아하는 아마추어 기록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야구 선수의 능력을 판단하는 지표는 타율과 평균자책점이 고작이었다. 앞선 세이버메트리션들의 시도는 실제 야구 현장에 적용되지 못하고 잊혀졌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빌 제임스는 RC, Win Share, 순수장타율, 피타고리안 승률, RF와 같은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들을 개발했다. 그리고 자신이 고안한 지표들을 야구 관계자들에게 알리려 노력하지만 그의 이론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빌 제임스는 다음 단계로 자신의 이론을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Baseball Abstract> 즉, 야구개요서다. 책이라고는 하지만 본인이 직접 복사하고 스테이플러를 박아 한 권씩 제본한 이 책은 모두 75권이 판매되었다. 이것이 1977년의 일이었다. 빌리 빈의 성공으로 빌 제임스는 뒤늦게 야구계의 관심을 받게 되고 앞선 레드삭스의 구단주가 빌리 빈을 영입하려던 바로 그 해. 그러니까 2002년에 레드삭스의 경영자문으로 영입되며 정식으로 야구계에 데뷔하게 된다.


1977년과 2002년 사이. 주류 야구계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그 사이에도 그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야구개요서는 그 이름을 빌 제임스 핸드북으로 바꿔 매년 출간되었고 1983년에는 <프로젝트 스코어시트>라는 캠페인을 진행한다. 세이버메트릭스 지표들을 개발하고 검증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원 데이터, 즉 스코어시트가 필요하다. 구단을 통해 이런 정보들을 제공받을 수 없던 빌 제임스는 야구팬 여러 명이 한 경기씩 기록을 맡아 데이터를 쌓아가는 캠페인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당시 메이저리그 구단은 모두 스물여덟 곳으로 하루에 최대 열네 경기가 열렸다. 열네 명의 사람이면 메이저리그 전체 경기의 스코어시트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캠페인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Retro Sheet>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감상으로 혁신과 같은 거창한 주제를 들먹이고 싶지는 않다. 물론 시대를 앞서가고 선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내가 떠올린 것은 아마추어리즘이었다.


<머니볼>은 플레이 타임이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영화다. 그중에서 빌 제임스의 이름은 빌 제임스의 헛소리를 믿는 건가? 라는 한 스카우터의 대사 속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와 함께 한 아마추어 기록원들의 흔적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관통하는 세이버메트릭스라는 이론은 그들의 노력으로 탄생했고 프로 스포츠계가 신봉하는 이론으로 거듭났다. 한 걸출한 아마추어인 빌 제임스가 주도하기는 했으나 이름 모를 아마추어 기록원들의 집단 지성이 이뤄낸 성과다. 야구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라는 대사에 아직 백 퍼센트 공감할 수는 없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그들이 야구를 이끌어가고 변화시켜 간다는 사실만은 이제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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