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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 Oct 22. 2023

내 머릿속 지우개

5회 말


정확한 용어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소비자의 잠재 심리를 이용하는 TV 광고 기법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우리가 보는 영상은 보통 분당 30 프레임의 정지 화면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중 하나 혹은 몇 개의 프레임을 광고 화면으로 몰래 바꿔치기하는 기법이었다. 우리의 눈으로는 이 바꿔치기를 알아챌 수 없지만 잠재의식은 숨겨진 광고를 기억하게 되고 무의식적으로 해당 제품을 구입하거나 우호적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보다는 조금 덜 은밀한 영상 실험도 매체를 통해 접한 적이 있었다. 피실험자는 모니터 속의 특정 인물 혹은 상황을 주시하라는 주문을 받는다. 피실험자가 화면 속 대상에 집중하는 사이 그 대상 주변으로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고릴라 가면을 쓴 사람이 대상의 주변을 맴돈다든가 하는 보통의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실험자들은 이것이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함은 물론이고 이 돌발 상황 자체를 기억하지 못했다. 실험에 관한 보도를 보며 그 결과가 신기하기도 하면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저렇게까지 놓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들었다.


잊고 있었던 이 실험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야구 기록을 시작하고 나서다. 어떤 분야에 새롭게 발을 담그게 될 때면 그것이 어떤 일이건 간에 긴장을 하게 마련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서툰 티가 나지 않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집중을 하는 수밖에는 없으니까. 야구 기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경기를 지켜보곤 했는데 그럼에도 크고 작은 실수가 반복되곤 했다.


공격팀이 한 이닝에 엄청난 점수를 내면서 경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즉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면 어떤 오류가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도 있다. 로마 숫자 1과 2, 그리고 3이 기록지에 표시되어 아웃카운트 세 개가 채워지면 한 이닝이 끝나게 된다. 그런데 기록지 상에는 두 개의 아웃 표시 밖에 없는데 공수 교대가 이뤄지는 경우도 몇 번인가 있었다. 두 명의 심판과 양 팀 선수 모두가 아웃카운트를 잘못 계산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기는 힘드니 어딘가에서 아웃카운트 하나를 놓친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기록지 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주자가 루상에 출루해 있기도 하고 기록지에 표시된 베이스와 다른 베이스에 주자가 서 있기도 했다. 반대로 루상에 있다고 표시된 주자를 실제 그라운드 안에서는 찾을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이 보다 더 곤란한 경우도 있다. 한 팀이 공격을 끝내고 수비를 한 다음 다시 공격을 할 차례가 되어 선두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는데 기록지 상에서 해당 타석에 들어서야 할 선수가 아닌 경우다. 이전 이닝이 1번 타자에서 끝이 났다고 하면 다음 이닝은 2번 타자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3번 타자가 등장하는 식이다. 같은 이닝 안에서 파악된 오류는 그나마 정정을 할 여지가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짚어가는 것이 훨씬 힘들어진다.


이런 일이 왜 자꾸 일어나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렇게 찾은 해답이 바로 집중이었다. 다만 집중을 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집중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자연스레 앞서의 실험이 떠올랐다. 피실험자가 대상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돌발상황을 기억하지 못했듯 하나의 움직임에 집중하느라 다른 움직임을 놓치고 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라운드 전체를 보고자 하는 노력 때문이었는지 기록의 경험이 늘어났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실수는 이제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


반신반의했던 앞서의 실험 결과를 이제는 백 퍼센트 신뢰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극단적인 설정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에서 이와 비슷한 일은 숱하게 일어나고 있다. 기괴하고 올바르지 않은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상황은 특히 돈이나 이성과 관련되어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한 군데 몰입되어 현실파악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주위 사람의 조언까지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니 본인이나 주위 사람이나 그저 서로를 답답하게 여기게 된다.


이런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야구 기록이야 수정을 하면 그만이고 수정이 힘들더라도 한 게임 기록 오류에 그치고 말겠지만 우리 인생은 지난 일을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누구든 그러리라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도 그런 경험이 없지 않다. 게임 수가 쌓여가면서 야구 기록에서의 좁은 시야는 조금씩 줄어들지만 실제 인생에서의 편협한 시야는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줄어드는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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