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의 언니 서촌에 가다

*새우볶음밥 :서촌 영화루

by HERMITAGE

조선의 수도가 될 뻔했고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이 내린 이름의 衍禧(연희)동은 어쩐지 들를 때마다 복이 퍼지는 것 같더라니, 육백 년 전 이름에 새겨 넣은 기운이 깃든 땅이 주는 힘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6.25 때 서울을 수복할 수 있게 만든 決戰地(결전지)인 능선 104미터의 고지가 있고 낮은 주택만으로 골목을 비밀스럽게 채워 넣은 서울 중심의 비밀 정원 같은 곳의 매력은 지나온 날들 중에 종종 서울 안에 도피처가 되어주곤 했다. 단일 행정동으로는 서대문구에서 가장 인구가 많지만 정작 거리는 기분 좋게 한산하여 걷기 좋은 연희동을 닮은 서촌에 갔다.


처음에 서촌은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였다. 길을 나서면 익숙한 이름의 프랜차이즈 빵집이 보이고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으면 어쩐지 이미 낡은 동네에 크고 작은 가게들이 골목 사이에 줄지어 세워진 하나의 가게처럼 길을 촘촘하게 채워 넣고 있는 모습은 밤에도 꺼지지 않는 도깨비시장 같기도 했고 어딘가 신비로운 한옥으로 지어진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불러일으켜지는 곳이었다. 어느 날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스페인 와인을, 또 한 번은 제철의 해산물을 체험하겠다고 호기롭게 계단을 걸어 오르기도 했으며 철판요릿집 가기를 좋아하는 대학 친구와 나란히 앉기도 했다가 이제는 골목 끝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던 친구 녀석은 조선을 아니 한국을 떠났지만 길 끝에 있는 한옥 레스토랑까지 여전히 낡은 그 길은 전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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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만 해도 한적하게 정원을 거니는 것 같은 연희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도피처라거나 공회전 같은 사색의 장소는 아니었다. 밤을 붙잡았다면 그랬고 하루를 내일의 낮과 맞바꿨다면 그 정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통인시장을 향하는 대로변과 주변으로 뻗어있는 작은 골목은 조금씩 달라졌다. 불친절하게 이루어진 골목들이 작은 골목 하나하나를 구태여 돌아보게 만들었고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을 자극했다. 대부분의 길을 산 아래 초입 부분까지 가서야 문득 마지막으로 독일의 감성이 오롯이 담긴 카페 <데스툴>을 갔을 때의 연희동이 떠올랐다. 아마, 연희동에게 언니가 있다면 서촌의 통인동이나 누하동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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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선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부터 서촌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당시 북촌은 양반들의 견고하고 권위 있는 한옥집이 모여있는 동네였다면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살았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수성동의 계곡을 그렸고 별 헤는 밤을 몇 날 며칠 지새운 시인의 하숙집 터가 있고 마음속 깊이 흠모하는 ‘이상의 ’이 남아 있어 천재의 작품혼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거리다. 오래된 서점은 몸을 구겨 넣지 않고는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 문과 이미 한참 전에 떨어져 나간 듯 보이는 간판은 오롯이 보전되고 있는 역사의 숨결을 그리 깊게 들어가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게 한다. 아직 걸어보지 않은 다른 골목으로 또다시 향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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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끝에 다 와갈 때쯤이었다. 족히 백 년은 되어 보이는 건물이었다. 오래된 건물을 마주하면 항상 속으로 떠올리는 질문이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명쾌한 답은 세워진 배너가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삼대와 백 년, 그리고 오십하고 오 년이라는 헤아려도 체감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세월을 짊어지고 선 오래된 가옥 안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처음부터 참기 어려운 호기심을 마주했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섰지만 당장은 들어가지 못했다. 노포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TV 프로그램과 어디선가 들어봤던 서촌의 오래된 중국집이 바로 이곳이라는 확신, 아직은 낯선 골목길에 숨겨놓은 진주 같은 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다른 서촌을 아직 더 돌아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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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 바로 옆의 거리와 확실히 다른 분위기는 어딘가 모르게 좋아하는 동네의 고즈넉함을 닮은 편안하고 조용한 길들이 아름아름 자꾸만 생각나는 것이었다. 볕이 잘 드는 날 나이보다 몇 배의 시간을 살아온 건물 한 편의 창가에 앉아 누구보다 오랫동안 육중한 웍을 들어 올려 세월이 흘러도 변하는 것은 나이와 같은 숫자밖에 없다는 듯이 시간을 업신여기는 듯 보이는 곳에 앉아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에 있는 메뉴를 주문한다. 지난날 미루고 참았던 호기심을 여과 없이 해소했다. 거칠고 투박하게 흘러가는 안쪽의 시간은 바쁜 만큼 정겨웠고 다른 의미에서 따뜻했다. 들이치지 않는 창가의 햇살만큼만, 아직 기온이 높지 않아 무뎌진 바람처럼 뭉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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