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형벌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어릴 적엔 우리 집 형편을 피부로 느낄 일이 별로 없었기에(동네 친구들의 삶이 다 비슷해서) 나에겐 세상의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믿었다. 무슨 일이든지 내가 하고자 마음먹으면 가능하다 생각했다.
학창 시절 형벌처럼 느껴지던 숙제들은 내가 해낼 수 있는 범주의 일이기에 지금에 와서는 참 달콤하게 느껴진다. 살아보니 내 의지와 내 능력이 가닿지 않는 영역이 무한히도 넓었다. 임신도 그중에 하나였다.
실은, 지난주에 나는 임신을 했었다. 마지막 서술어로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오늘 우리 부부의 아이가 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이 우리의 삶에서 저만치 멀리 떠나버렸다. 화학적 유산이라는 단어. 임신을 준비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주워듣었던 말. 난임이 나의 일이 될지 몰랐던 것처럼, 화학적 유산이라는 단어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을 거라 생각지 못했다.
지난 주말 테스트기의 희미한 두줄을 받아 들고 나에게 벌어진 이 행복한 사건이 믿어지지 않아 그 옅은 세로줄을 보고 또 보곤 했다. 병원에서의 피검사 결과로도 임신이 맞다는 전화를 받았고, 그 길로 우리 부부는 꽃길만을 걸을 거라 생각했다.
역시 내가 운동을 시작하길 잘했다며 걷기 운동의 가장 큰 공헌이 바로 이것이라 생각했다. 그간 매일 운동 기록을 남기며 사실 이번엔 어쩌면 임신 일지 모른다 생각했었다. 걷기 운동 외에 복근 운동을 근 20일 가까이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런 이유 없이 배가 더부룩하면서 평소 허리둘레보다 자꾸 조금 더 나왔다. 몸무게도 아주 약간이지만 늘었고 그게 일주일 이상 지속되기에 그때부터는 운동 강도도 줄이고 걷기도 조절했었다.
그런데 엊그제였던가? 운동 후 물 한잔 마시기를 시작한 다음날 아침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배가 홀쭉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무얼 안 먹어도 땡땡하던 배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0.1초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애써 그 가능성을 털어내고 자기 전 물 한잔 마신 게 이런 효과가 있나? 하고 넘겼다. 다음날도 배가 홀쭉했다. 결혼 전 내가 생각날 정도였다. 최근에 이렇게 가벼운 적이 없었는데...
그리고 오늘 다시 병원에 가서 호르몬 수치가 늘었는지 확인을 하러 갔는데 어두운 표정의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치가 낮아졌어요..." 잠시 잠깐 온갖 가능성으로 우리 부부를 미소 짓게 하던 그 희망이 깨지는 소리였다. 나는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모른 채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었고, 차마 버리지 못한 희망을 품은 채 다시 수치가 오를 수도 있는 거냐 물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침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편의 손을 붙잡고 병원 밖을 나와서야 참았던 눈물이 댐이 터지듯 쏟아졌다. 나도 안다. 화학적 유산은 흔한 일이고, 염색체 이상이 있는 배아라서 자연스레 유산이 되는 거라고. 슬퍼만 할 일은 아니란 것을. 하지만 왠지 엉엉 울어야지만 눈물과 함께 내 미련, 내 슬픔, 내 자책감을 모두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망한 기색인 남편은 나를 달래는데 집중을 했다. 괜찮다고, 슬퍼하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다독이는 그에게 괜히 "나 좀 슬퍼하게 내버려 둬"라고 심술을 부렸다.
병원에서부터 집까지 남편과 걸었다. 30분 동안 나는 계속 훌쩍이고, 남편은 내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집에 와서도 한참을 더 울다가 문득 엄마가 보고 싶었다. 세상 일이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거나 내가 너무 작게 느껴질 때면 엄마가 보고 싶다. 다음 주에 둘째 출산을 기다리는 언니네 집에 가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엄마는 내가 잠시 잠깐 임신을 했다는 사실도, 오늘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모른다. 그냥 담담하게 별일 없는 듯 일상적인 통화를 했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지만 엄마까지 울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오후부터는 마음을 추슬렀다. 생각해보면 지난 일주일간 내게 아이가 생겼다는 게 단 한순간도 믿기지 않았는데...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했다. 과학이 너무 발전해서 굳이 슬퍼하지 않아도 됐을 일을 알게 되어 눈물을 흘렸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남편은 어쨌든 임신 시도 3달 만에 자연임신의 가능성을 봤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나를 위로했다. 자신도 운동하며 건강을 챙겨 돕겠다며.
지독히도 더운 낮이 지나고 저녁이 되어 남편과 걷기 운동을 나섰다. 일주일간 조심히 걸었는데 오늘은 그동안 못 걸었던 만큼 실컷 걸어나 보자.
2020.06.13 매일 걷기 61일차!
오늘은 집에서는 좀 더 멀지만 평소 가던 공원의 2배 크기의 공원에 갔다. 처음 가보았는데 너무 넓어서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반나절만에 마음이 많이 진정되어 슬픈 마음 없이 걸을 수 있었다.
오늘 같은 날도, 나는 걷는다.
걷는 것만은 그래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 팔을 움직이고 싶으면 움직이고, 빨리 걷고 싶으면 빨리 걷고, 오른쪽 길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걸어갈 수 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하나쯤이라도 있어서 다행인 밤이다.
세상만사가 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날에도 나는 걸어야지. 나아가야지. 내 슬픔을 깔고 앉지 말아야지.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