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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Aug 16. 2021

써야 자는 인간


새벽 5시가 되어간다. 보통 절대 뜬 눈으로 핸드폰을 보고 있을 시간은 아니다. 브런치에 시들해지고, 다른 이의 글도 읽을 심적인 여유가 없던 지난 반년. 그 사이 겨우 4년이란 세월만에 고물이 되어버린 폰이 결국 세상을 떴다. 어느 날 갑자기 전화 수신이 잘 안되더니 어플 실행은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나서도 한참 뒤에나 됐다. 사실, 내 핸드폰이 스스로 생을 다했다기보다 내가 측은지심으로 고생하지 말라며 인공호흡기를 뗀 셈이다.


더 이상의 혁신은 없다, 생각했건만... 새로 장만한 최신 핸드폰의 성능은 놀라웠다. 빠른 속도감에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이 짜릿함을 오래 느끼고 싶어서 정말 필요한 어플들만 새로 깔았다. 그러다 보니 예전 핸드폰에는 깔려있었던 대부분의 어플들이 간택을 받지 못했다. 브런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몇 개월간 단 한 개의 글도 쓰지 않았고, 그 누구의 글도 들어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몇 개월의 공백을 깨고 다시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1시에 침대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게임이었다. 요새 푹 빠져서 하는 게임이 하나 있는데 같은 아이템을 합쳐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또 그 새로운 아이템을 모아 합쳐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형식의 게임이다. 남편은 자기가 보기에 영 지루해 보이는지 자꾸만 더 재밌는 게임을 추천해준다는데 나는 '하나에 꽂히면 한 놈만 패는(?)' 그런 타입의 사람이기에 한사코 거절했다. 지저분하게 늘어나 있던 아이템들을 착착 합쳐서 단 하나의 최종 단계 아이템으로 정리를 하면 집 대청소를 막 끝낸 기분을 느끼게 된다. 물리적인 집 청소는 품이 많이 들지만, 이건 손가락 몇 번 슥슥이면 그에 버금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집 청소가 하기 귀찮을 때 특히 생각이 난다.


이 게임의 한 가지 단점이라면 에너지가 너무 금방 단다는 것이다. 2분에 에너지 1을 채워주는데 아이템 하나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최소한 에너지 2개를 써야 아이템 2개를 얻을 수 있다. 그마저도 동일한 아이템이 나와야 합칠 수 있으니 사실상 풀 에너지 100을 다 쓰는 데는 몇 분이 걸리지 않는다. 너무 금방 0으로 변해버린 에너지에 감질맛이 났다. 원래 게임에는 과금하지 않는다는 게 나의 신조였으나 '게임 개발자들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냐' '카페 한 번 갈 돈으로 그에 버금가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소비 아니냐'는 남편의 논리에 이미 설득당한 지 오래라 이 게임을 설치한 직후 3번 결제를 눌렀다. 한 달 전의 이야기다. 결제 직후의 즐거움은 카페인의 후유증보다도 지속시간이 짧았다. 카페에서 커피도 시키고, 조각 케이크도 시킨 만큼의 돈을 들였는데 게임 속 에너지는 두 시간도 안되어 바닥이 났다. 그 후로는 절제하는 법을 배웠다. 과금 3번이면 재밌는 게임을 만들어 준 개발자들에게  내 할 도리는 다 한 것이니 감질나도 참자.


짧은 게임을 즐기고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영 잠이 오지 않았다. 그 후로 4시간 동안 나는 유튜브를 보다 자려고 했다가 핀터레스트를 보다 자려고 했다가 쓸데없는 미래의 고민을 했다 자려고 했다가 웹툰을 보다 자려고 했다가 말똥말똥 천장을 보다 자려고 했다가 명상한답시고 코 끝에 정신을 모아보다 자려고 했다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맞아. 나는 써야 자는 인간이었지.


부랴부랴 브런치를 깔고,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정신은 여전히 말짱했고 글에 집중하는 동안은 결국 잠들지 못하겠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자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고요한 적막과 심심함과 씨름할 필요가 없어진다.


몇 달 전 마지막으로 쓴 글도 잠 못 드는 밤에 쓴 글이었다. 나는 꼭 술에 취해야만 새벽에 전화를 거는 구남친처럼(아, 내 구남친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잠이 오지 않아야만 브런치를 찾는 구작가(?)다. 내 주사 같은 넋두리를 잠자코 받아주는 마음씨 고운 브런치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그런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내가 자주 올게. 자주 쓸게. 자주 읽을 게. 물론 술이 깨면(내 경우는 잠이 깨면) 자신이 늘어놓은 약속을 단 한 개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진심을 다하여 다짐해본다.


나, 자주 올게. 잊지 않을게.




근데 나 좀 졸리네? 일단 오늘은 좀 자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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