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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뮤 Oct 22. 2019


종의 기원 (정유정)

내 안에 사이코패스 있다



 영어로 Page-turner이라는 표현이 있다. 책장을 넘기지 않고는 못 베기는 책. 바로 정유정 작가의 책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녀가 쓴 또 다른 책 '7년의 밤'을 읽을 때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읽고 자야지'하다가 새벽 두 시나 세시가 되어야 마지못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종의 기원' 때문에 며칠간 또 늦잠을 자고야 말았다.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인터넷 뉴스를 도배하는 끔찍한 살인사건들 뿐만 아니라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빠지지 않는 단골이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이코패스에 관한 뉴스 기사가 뜨면 클릭해서 읽게 된다. 이 정도로 미디어에서 떠들에 대면 식상할 만도 한데 '어떻게 인간이!'라는 탄식을 자아내는 그들의 악행은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들어도 매번 새롭고, 충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의 기원'이라는 책은 사이코패스를 다룬 다른 책들과는 전혀 급이 다르다. 절대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던 그 악인의 자리로 독자를 기어코 데려가 앉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본성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어두운 숲'을 안으로부터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악인을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글을 잘 써야 사이코패스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하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란다. 다만 주인공 유진이 저지른 악행에 도덕적 동의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때로 그의 눈으로, 그의 귀로, 그의 혀로, 그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마치 내가 겁에 질린 사슴의 작은 떨림과 미세한 숨결만으로도 온몸에 털이 곧추서는 최상위 포식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 제목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다.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유정 작가가 생각하는 '악인'에 대한 정의를 유추할 수 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윈이 말하는 '진화'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진화에서는 유전적 형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 유전적 형질은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 유전적 형질은 아무런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주어진 특수한 환경 속에서 생존에 가장 적합한 유전자가 살아남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우월한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유진도 마찬가지다. 그는 최상위 포식자의 유전적 형질을 타고났으나 결국 그의 내면에 존재하던 악을 점화시킨 것은 그를 둘러싼 환경이었다. 유진의 남다른 기질을 진즉에 깨닫고 이를 억누르려 했던 엄마와 이모의 모든 노력이 그를 오히려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대중 소설로서도 훌륭하지만 선과 악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확장시켜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도 꽤나 인상적인 작품이다. 믿고 읽는 작가 리스트에 추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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