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가 슬슬 풀린다. 매일 걷기 운동을 시작한 지 오늘로써 18일째가 되었다. 새로운 계획이나 도전이 주는 설렘과 흥분이 가라앉을 때쯤 어김없이 안일한 생각이 든다. '아, 오늘은 운동 갈 기분이 아니다'
느슨한 생각으로, 느슨하게 기상하고, 느슨하게 아침밥을 챙겨 먹고, 느슨하게 늘어져있다 출근을 했다. 노동자의 날이지만 나는 노동자가 아닌가 보다. 황금연휴라 불리는 시기라서 학생들이 많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예상대로 한산한 하루. 아이들이 없을 때는 실컷 책을 읽었다. 게으르게 아침을 시작했더니 영 기분이 찝찝하다. 아침 식사 시간도 미뤄지고, 그래서 점심도 못 먹고 바로 출근을 했더니 퇴근 시간이 되기도 전에 배가 무진장 고팠다.
계획대로라면 퇴근 후 집에 가는 길에 공원을 들려 운동을 해야 했다. 그런데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을 정도로 배고픈 상태에서는 단 한 바퀴도 걷지 못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바로 갔다. 아침에 아무것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는 당연히 먹을 것이 없었다. 남편을 꼬셔서 피자를 시켰다. 모든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만끽하기로 작정한 듯이...
피자를 다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하고 내 몸에 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길티 플레져라는 말의 순서를 놓고 보면 먹을 땐 죄책감이 들어도, 먹고 나선 기뻐야 하는데... 먹을 땐 행복했으나 먹고 나니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오늘 하루의 모든 죄책감을 한 방에 씻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하나뿐이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운동 바지와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고해성사하러 가는 기분으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나를 공원으로 데려다 주렴. 그곳에서 오늘의 게으름을 모두 쏟아내겠어.'
공원에는 아침시간에 두 배정도 되는 인원이 바쁘게 걷고 뛰었다. 이 사람들 중 몇몇은 나처럼 오늘의 게으름을 떨쳐내려 나온 이들도 있겠지. 나는 공원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첫 발걸음을 떼자 안도했다. 18일째 내 다짐을 지켰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열심히 두 다리를 움직였다.
오늘은 금성에 대한 재미난 과학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 예체능을 뺀 모든 주요 과목들을 싫어했는데 다 늦은 나이에 과학이 신기하고 재밌다. 금성의 어원이나 대기 온도, 그곳에 보낸 수많은 탐사선들의 이름과 그곳에서 버틴 시간 따위는 일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화성보다 태양에 가까운 금성이 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정도의 온화한 기온일 거라 예상했다는데 실제 금성의 대기온도는 무려 400도가 넘는다고 한다. 지상낙원을 상상했는데 알고 보니 지옥이었던 셈. 내 평생 직접 가볼 것도 아니고 관계도 전혀 없지만 행성에 대한 이야기는 연예인들 가십거리만큼 흥미롭다.
공원을 도는 동안 남몰래 트림을 엄청나게 했다. 트림의 횟수가 늘수록 속은 점점 편해졌다. 더부룩하고 불쾌했던 속이 뻥 뚫렸다. 죄책감도 빠져나간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약속을 지켰지만 다시 느슨해진 고삐를 꽉 조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