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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PD 빅대디 Jun 28. 2024

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정우와 할매

첫 연출로 인간극장을 찍을 때는 봄느낌 나는 꽃을 찾아 인서트 그림을 찍기 위해 헤매던 늦겨울과 초봄 언저리의 시간이었는데, 3번째 주인공을 찾아 나설 때는 완연한 여름으로 들어서던 무렵이었습니다. 여름을 맞아 바닷가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울산에서 물질하는 소년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저의 3번째 인간극장 주인공은 바닷가 마을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물질하는 남자아이, 정우였습니다.

2014년 여름에 방송된 인간극장 <정우와 할매>

정우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처음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할머니들 사이에서 덩치 큰 물개 같은 몸집으로 물질하는 남자아이, 고정우. 동네 할머니들 모두를 살뜰히 살피고 옛날 노래를 좋아해 할머니들에게 불러주고 하며 살고 있는 기특한 아이로 소개되었습니다. 청년 때부터 청소년들과 만나는 걸 좋아하고, 교회에서 청소년부 교사도 했었던 터라, 고등학생 아이를 만나는 게 꽤 설레고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나이대 아이의 이야기를 꼭 한 편은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서울에서 울산까지 먼 거리를 달리고, 울산 시내를 통과해 바닷가까지. 거의 5-6시간을 운전해 정우가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했습니다. 아주 좁은 골목 같은 길을 지나 나온 정우네 집. 좁은 길 사이로 보이는 바닷가를 앞에 두고 뒤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가려주고 있는 아주 작은 시골집. 우거진 초록빛 나무들 아래에 자리한 그 집은 가난해 보이지만 뭔가 동화 속의 집 같은 느낌도 좀 주는 집이었죠.


“계세요?” 하고 부르자 그 자그마한 시골집에서 기골이 장대한 아이 하나가 나왔습니다. 느낌이 꼭, 호빗 집에서 해그리드가 나오는 느낌이었달까요. 저도 어디 가서 덩치로 밀리는 일은 없는데 저보다 더 큰 아이가 떡 하고 등장했습니다. 그게 정우의 첫인상이었더랬죠. 그런데 말투는 구수한 할머니 말투, 하지만 목소리는 또 앳된 여러 가지 반전 매력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정우네 집 앞에 있는 작은 야외테이블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더 매력이 드러나는 아이였지만, <세상의 이런 일이>에 나온 정우의 모습보다 한 단계 더 깊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정우의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트로트 가수!
촌에 사는 아라도 꿈은 있다 아잉교.


이거다 싶었습니다. 해남으로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지만, 꿈꾸는 소년 정우의 모습. 그리고 가진 게 적다고 해도, 모두에게는 꿈이 있고 꿈을 향해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정우의 이야기를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7월 한복판의 울산은 아주 무더웠습니다. 바닷가의 습하고 더운 바람에 아주 쉽게 옷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렇게 해가 쨍쨍하고 날이 무더워도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걸 찍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날씨라는 게 있더라고요. 바람이 바닷물을 움직여 놓으면 바다 아래쪽의 물이 뿌옇게 되어서 앞이 안 보여 물질을 할 수 없다는 거였어요. 물질하는 해남 정우의 모습을 찍는 것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물이 어두버가’ 물질하는 장면을 거의 촬영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아침마다 일어나 어촌계장님의 안내 방송에 귀 기울이다가 상어가 출몰했다는 제보가 있었으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듣게 되어서 동네 해녀 할머니랑 관해서 얘기 나누는 모습도 촬영하게 됐고요. 제발 물질 좀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용왕님한테 쌀이랑 동전이랑 넣어서 바다에 던지며 혼자 제사 지내는 모습도 촬영했습니다. 진짜 신기했던 건 그러고 바닷가에 앉아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궂었던 그날의 날씨가 잠시 파란 하늘을 내어줬던 장면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20일의 기간 중에 딱 2번 아주 짧은 시간만 물질하는 정우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남이 아닌 인간 고정우를 더 담을 수 있었습니다. 물질하지 않는 그냥 17살 고정우의 모습을 더 많이 담을 수 있었거든요. 동네 할머니 부탁으로 TV가 안 꺼지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모습도 찍고 (사실 리모컨 건전지가 없어서 그랬던 거라 40원짜리(?) 건전지를 사다 갈아 껴드리는 걸로 문제 해결!) 바닷가에서 트로트 부르고, 할머니랑 가요무대도 보고, 시장에서 닭 사다가 동네 할머니들 대접하기도 하는 시간도 갖는 등 오히려 더 다양한 장면들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방학을 맞아 학교 친구들이 바닷가에 사는 정우네 놀러 와서 함께 노는 장면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놀러 왔는데 때마침 전국노래자랑이 나오고 있었고, 애들은 뮤직뱅크는 안 보냐며 핀잔을 줬죠. 걸스데이는 아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안다고 말했지만 멤버 이름은 한 명도 말하지 못한 정우. 정우와 친구들은 그 길로 바다로 가서 물놀이를 합니다. 친구들에게 문어라도 한 마리 잡아서 대접을 하겠다며 물속으로 들어간 정우, 물밖으로 나온 정우의 표정은 한껏 들떠 있었습니다. 손에는 5만 원짜리 지폐가 들려 있었죠. 그리고 거푸 물속으로 들어가 만 원짜리 4장을 더 꺼내 들고 나왔습니다. 용왕님이 제사도 드리고 했더니 오랜만에 물에 왔다고 용돈 줬다며 너스레를 떠는 정우. 회사에서도 그 장면을 보고는 다들 물어보더라고요. 네가 바닷속에 돈을 좀 넣어둔 거 아니냐고요. 사실은... 제가 돈을 바다에 넣어놨던 건 아니고요. 이장님께 들어보니 며칠 전에 그 근처에서 술에 취한 어떤 분이 얕은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분이 흘린 것 같다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아무튼 이 에피소드 덕에 재미있는 그림을 담을 수 있었죠.


아무튼 돈을 주운 정우는 신이 나서 집에 달려가 할머니에게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고는 5만 원을 할머니 용돈으로 드리고, 읍내에 나가서 4만 원어치 고기를 사다가 친구들과 실컷 구워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친구들이 올해는 한번 같이 부산으로 놀러 가자는 말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물질을 해서 용돈 벌이라도 해야 했던 정우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정우의 표정이 괜히 짠했습니다.


정우는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님과 살 수 있는 선택지가 있음에도 할머니와 살기로 결정했거든요. 정우는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해서 생계에 보탬을 주고자 했고, 그래서 보통 17살 친구들처럼 친구랑 여행을 갈 수도 없었고, 꿈을 좇으며 살기도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우에게는 분명한 자기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할머니와 함께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을 시청하며 사랑에 빠지게 된 트로트를 부르는 사람, 트로트 가수가 되는 거였죠. 그래서 저희 제작진도 인근 가요제를 찾아 함께 참가도 해보고 하면서 정우의 꿈을 향한 걸음을 응원하고,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종종 연락하고, 서울에 오면 만나기도 하면서 인연을 좀 더 이어갔는데요. 저의 인맥으로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 늘 미안했지만,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아침마당 노래자랑 촬영하러 할머니랑 함께 왔을 때, 만나서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게 할머니와는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얼마 후 다른 촬영지에서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정우가 이제 진짜 홀로서기를 시작하겠구나...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우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아이였어요. 그 이후, 아예 서울로 올라와서 가수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진짜 정우가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한 이가 꾸었던 꿈도

정말 애쓰고 노력하면 이뤄진다는

증거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고맙게도 정우는 슈퍼스타K에서 슈퍼위크도 나가 보고, 아침마당에서 5연승 가수가 되더니, 몇 년 전 미스터트롯2에서 본선까지 진출하면서 이름을 알려, 지금은 어엿한 트로트가수로 활동 중입니다.


보란 듯이 꿈을 이룬 거죠.

정우는 할머니와 함께 보던 가요무대에도 서는 '가수'가 되었습니다 (출처:인스타그램 @kojeongwoo_98)

이제는 너무 바빠져서 연락을 먼저 하는 게 미안한 지경이 되었지만, 정우의 걸음들을 지금도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꿈을 함께 바라보고, 그 꿈을 응원하며, 그 꿈을 이루는 모습까지 함께 보면서 너무나 행복한 경험을 하게 해 준 너무나 고마운 주인공을 만났습니다.


혹시나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인간극장 <정우와 할매> 1부 다시보기

https://youtu.be/8rxqpPKY4cE?si=iLJbXBOzLN57iw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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