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내가 기억을 잃었습니다
인간극장은 보통 20일, 거의 3주 동안을 촬영합니다. 이후에 하루 이틀 정도의 추가 촬영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일단 가장 일반적으로 진행하는 기간은 3주입니다. 3주를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다 보니... 출연자 분들과 자연스럽게 거의 식구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고는 해요. 그렇기 때문에 더 속 깊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스토리에서 나누게 될 인간극장의 주인공은 유난히 깊이 감정이 쏟아지는 순간이 많았던 분입니다.
첫 인간극장을 마무리하고 꿀맛 같은 1주일 정도의 휴식을 취한 뒤, 다음 인간극장의 주인공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인간극장을 후속편으로 진행했던 터라,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해서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목포, 부산, 울진 등 정말 많은 곳의 후보자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충청북도 보은군의 한 마을에서 살고 있는 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처음 만나러 간 이유는 장에 대한 진심과 그걸 가꾸어 가는 아담하고 예쁜 집을 보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한 가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잠시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우셨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저씨가 조용히 한 마디를 건네셨습니다.
지금... 제 아내가 기억을 잃어버렸어유.
장류 사업과 함께 불교용품을 만들어 전국 사찰에 판매하고 있던 두 부부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거래처에 납품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이 사고의 충격은 아주머니의 단기 기억을 모조리 앗아갔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 일이 부부에게 일어난 거죠.
사고 이전의 아주머니는 굉장히 밝고 사교적인 분이었습니다. 여러 사진 속에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죠. 그런데 사고 이후 아주머니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걸 극도로 힘들어했습니다. 특히나 원래 잘 알던 사람이라는 분을 만나면 더욱 그랬죠. 그냥 길을 걸을 때도 사람들이 혹시나 나를 아는 사람일까 걱정하며, 사람들의 소리가 적게 나는 곳을 찾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아저씨는 그런 아주머니를 든든하게 지탱해 주고 있었습니다. 함께 했던 기억들을 끊임없이 옆에서 말해주고, 때로는 끌어당기고, 때로는 묵묵히 기다려주면서 아주머니가 자신의 기억들을, 모습들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왔습니다. 충청도식 유머는 덤이었고요. 좋아하던 정이품송의 수나무가 있는 공원에 들르는 장면이라든지, 조용히 손을 잡고 길을 함께 걸어주는 모습에서 아저씨의 속 깊은 사랑이 너무나 피부로 느껴졌습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주인공이었던 인간극장 <백발의 연인>편의 노부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제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 따뜻하고 알콩달콩하게 느껴졌더랬죠.
그리고 몸이 기억하는 예전은 참 신기했습니다. 아주머니의 손맛은 참 남달랐는데, 음식을 해서 주시는 것마다 정말 심하게... 맛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레시피가 적혀 있는 노트를 들여다보며 ‘되게 성실했던 사람이었나 보다’라고 말하면서도 명확한 수치가 다 적혀 있지 않은 레시피를 보고도 뚝딱뚝딱 심하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아주머니를 보며, 몸의 기억이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레시피를 적어놓은 노트를 수도 없이 들여다보며, 그 노트를 옮겨 적기도 했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그 안에 남아있는 과거의 내 사진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날들도 꽤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머니는 자기 머릿속을 설명해 주겠다며 종이 하나를 꺼내서 찢기 시작했습니다. 찢어진 종이 조각들을 던져 뒤엉키게 만들고는 이게 지금 내 머릿속 같다고 이야기하셨어요. 그리고 그 종이를 하나씩 하나씩 맞춰가고 있는데 1번과 2번이 맞아도 3번을 못 찾으면 여전히 불완전한 기억이라 너무나 혼란스럽다고 했습니다. 비유를 해보자면, <인사이드아웃 2>에서 본 것 마냥, 기억의 구슬들이 구분 없이 전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느낌이랄까요? 시각적으로 너무 잘 보여주셔서 깜짝 놀랐더랬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며 울먹이는 아주머니를 보고는 그 모습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과 왠지 모를 미안함 때문에 잠시 저도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정말 죄송한 마음이었어요. 왜냐면, 프로그램 하나 만들겠다고 남의 아픈 기억을 자꾸 들쑤시는 건 아닌지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크게 들었거든요. 어쩌면 그렇게까지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셔도 되는데... 반복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더 깊은 곳의 아픔들을 건드리게 만드는 게 죄송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출연자 앞에서 내 감정을 드러내고, 자리를 비우기까지 했다는 것이 촬영 감독님께 죄송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촬영 감독님이 그날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가면서 이야기해 주신 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며칠 더 촬영은 계속됐습니다. 조금씩 새로운 것들도 시도해 보는 아주머니의 모습과 다시 쌓아가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기억들과 방향들을 발견해 가는 아주머니를 보며 촬영을 마무리했습니다. 편집할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을 표현하는 것이 정말 어려웠어요. 그래도 여러 가지 촬영하며 발견했던 것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마무리해 방송을 냈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한번 더 보은을 방문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맛있는 밥상을 내어주시며 너무나 감사한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촬영 이후에 정신과 검진을 갔는데 증상에 많은 호전이 있었다고, 방송을 찍었던 게 도움이 되셨던 것 같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는 거였어요. 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감사했고요.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연락을 나누며 지내고 있답니다.
혹시나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인간극장 <제 아내가 기억을 잃었습니다> 1부 다시 보기
https://youtu.be/4J-LMyMRfrA?si=4dGvx8W6hcNWXx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