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와 '가족'
회사 밖은 지옥이야.
4년간 다닌 첫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부모님께 바로 말씀드리지 못했다.
최종 합격 전에 말씀드리면 걱정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하나하나 물어보실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던 첫 회사의 배정받은 팀은 생각보다 보수적이었다.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었던 나는 센스 있는 신입사원이지 못했고, 그 분위기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매일 폭식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부모님은 옆에서 나의 회사 생활을 걱정하셨다. 하지만 더 큰 걱정은 뉴스에서 계속 나오는 '고용난'이었다.
tv에는 요즘 청년들은 열심히 스펙을 쌓아도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고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뉴스가 계속 나왔다.
아빠는 "요즘 취업이 진짜 힘들다고 하더라.
지금 회사가 조금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참고 다녀."
라는 말을 계속하셨다.
나는 "세상에 더 좋은 회사도 많아요. 지금 회사보다 더 마음에 드는 곳 있으면 이직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말도 있잖니. 다른 곳은 더 이상한 곳도 많아. "라고 하며 내가 힘들다고 무작정 퇴사를 할까 봐 매일 걱정을 했다.
그러다 원하던 회사에 최종 합격을 하고 아빠에게 조심스럽게 이직을 원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의논이 아니라 통보였었다.
아빠가 내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한 것이다.
" 아빠 새로 가는 회사는 복지는 이렇고,
또 연봉은 이 정도는 올려 가고, 또 거기 가면..."
인터넷에 본 좋은 정보란 정보는 다 가져다 붙여서 이직하는 회사를 홍보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한 아빠는 그날 한숨도 잠을 못 자고 뒤척였다고 한다. 딸이 괜히 이직해서 또 다른 역경을 만날까 봐, 너무 고생할까 봐 말이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부모님과 함께 28년 정도를 지내며 모든 선택의 순간에 부모님이 함께 있었다.
대학교를 선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동아리는 가입할 건지, 엠티를 갈 것인지 모든 것을 의논했다.
대학교 4학년 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공무원이 해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는
"그게 언제 될지 모르는데 뒷바라지를 어떻게 하니"라고 걱정하셨다.
또 지방으로 내려가서 정부 산하 기관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는
"거기서 혼자 어떻게 자리를 잡고 일을 할 거니"
라며 현실적으로 안 되는 이유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모두 맞는 말이고, 나에게 필요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20살 이후 다양한 선택의 순간마다 나는 항상
'걱정을 시키는 첫째 딸'이 되었다.
정녕 틀릴지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부모님의 걱정이라는 무게에 못 이겨 마음을 접게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차피 이건 되지도 않을 건데 굳이 해봐야 하나'부터 시작해서, '이거 또 한다면 분명 걱정하실 텐데 말을 하지 말자'라는 마인드로 점차 바뀌게 되었다.
'어차피 좋아하지 않으실 거니깐 말하지 말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20대 후반을 지냈다.
회사 하소연을 하면 걱정을 하실 게 뻔해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성친구를 만나면 너무 큰 관심을 보이실 것 같아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한 번은 참여해보고 싶은 인문학 수업이 있었는데,
두 달간 매주 토요일에 인천에서 서울 강남까지 가야 했고 수업료도 40만 원 가까이 되는 금액이었다.
분명 이 수업을 들으러 토요일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고 하면 수업료는 어떻고 또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실 것이 귀찮았다.
이번 주에는 고등학교 친구, 다음 주에는 대학교 친구, 그다음 주에는 회사 동기들 이렇게 없는 약속을 만들어 가볍게 나가는 척 거짓말을 치며 인문학 수업을 들은 적도 있다. 이렇게 나는 '걱정 안 시키는' 딸이 되기 위해 거짓말을 치는 피노키오가 돼 가고 있었다.
떨어져 보니 더 애틋해지네
자취를 시작하며 반강제적으로 부모님의 간섭이 줄어들었다.
평일 밤에 약속이 늦게 끝나도 몇 시에 도착할 것인지 연락을 하지 않아도 되고, 주말에 늦잠을 자거나, 어딘가에 갈 때 어디에 가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처음에는 부모님도 걱정이 되시는지
"이번 주에는 뭐 했니?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라고 연락이 오셨다.
하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은 내가 알아서 집에 잘 들어왔겠거니 안심하시기 시작했다.
오히려 겁이 많아진 건 나였다.
자취를 시작한 후 집에 오히려 더 꼬박꼬박 일찍 들어가기 시작했다. 집과 나를 지킬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취 집은 서울이기 때문에 약속 장소와 가까울 때가 많았지만 귀가 시간은 빨라졌다.
그렇게 자취를 하게 되니 언젠가부터 조금씩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지켜야 하기 때문에 조금 더 보수적이었던 것이고,
함께 있었기 때문에 더 걱정이 됐던 것이었다.
인천에 있는 본가에는 이 주나 삼 주에 한 번 주말에 가게 되었다.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주말에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바뻤지만, 따로 살게 된 이후에는 본가에 방문하면 주말 하루는 부모님과의 시간을 꼭 가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엄마, 진짜 회사에서 000 이 이렇게 이야기해서 너무 힘들어요. 진짜 이 회사 못 다니겠어요."
"이건 진짜 나랑 안 맞는 거 같아요."
이전에는 회사나 인간관계에 대해 힘들었던 상태에서 푸념이나 하소연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힘들긴 해도 이런 업무를 하는 것도 재밌고 괜찮아요."
"퇴근하고 운동도 하고 재미있게 살아요"
와 같이 조금씩 긍정적인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나를 조금씩 더 믿어주고 신뢰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에 걸맞게 더 강해지고 단단해졌다.
그런 변화는 자취가 100% 완벽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성숙해지고 그게 맞게 공간의 독립도 시작됐기 때문이다.
추석봉투에 100만원을 넣은 이유
20대에는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나 해보고 싶은 것이 부모님에게 걱정이 될까 봐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회사 일이나 인간관계, 배우고 싶은 것 등 굳이 부모님에게 공유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몰래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취 후에 부모님과의 관계가 걱정이 아닌
신뢰가 쌓여가게 되면서,
'어떤 고민이 생기면 내 상황을 꾸밈없이 이야기하고 조언을 듣고 싶네.이제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엄마 아빠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겠다.'
라는 결심을 하게 됐다.
살면서 더 많은 경험을 한 부모님의 조언이 귀하기도 하고, 이 세상에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는 부모님의 응원도 절실해졌다.
앞으로 더 많은 선택의 순간이 올 텐 데 부모님과 같이 고민하면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작년 추석 이맘때쯤, 부모님을 찾아뵙기 전에
ATM 기기에서 100만 원을 출금했다.
5만 원권으로 20장을 뽑아 10장씩 봉투에 담았다.
진심이 담긴 기분 좋은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평상시 추석 때 드린 봉투의 금액보다 더 많이 돈을 뽑았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저는 10대, 20대 동안 제가 잘할 수 있을지 항상 걱정과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내 선택이 잘못될까 봐, 상처받을까 봐 엄마아빠도 항상 걱정이 앞섰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시기를 함께 지나고 엄마아빠도 저도 성숙해진 것 같아요.
앞으로는 걱정보다는 신뢰의 말, 긍정적인 말로 서로를 응원해 주면 좋겠어요.
저도 더 제 생각을 많이 이야기하고 많은 대화를 하려고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을 편지에 꾹꾹 눌러 담으면서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분명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지만,그 시기가 지나고 단단해진 게 느껴져서 뿌듯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성장한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엄마 아빠 이번에는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용돈과 함께 편지를 썼어요. 두 분만 계실 때 읽어보세요. "
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드렸다.
부모님은 원래 드리던 용돈 액수보다 높은 액수의 봉투를 보시고 일 차로 놀라시고, 갑자기 전해준 편지에 이차로 놀랐다.
나중에 들으니 갑자기 편지를 드리니 무슨 대형사고라도 쳤는지 갑자기 걱정이 됐다고 하셨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고 나는 다시 자취방에 돌아왔고
아빠에게 카톡이 왔다.
"편지랑 용돈 잘 받았어 딸. 앞으로 더 잘해보자"
라는 짧은 카톡이었다.
길게 쓴 편지에 비해서 단출한 대답이었지만 그 대답은 충분히 해답이 되었다. 앞으로 우리 가족 더 잘해보자고. 서로 더 믿고 응원하면서 지내보자고 말이다.
자취를 통해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공간에서 독립하며
부모님과의 관계가 신뢰를 바탕으로 더 끈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아빠는 자식을 독립시키고 자신들의 삶을 더 돌아보고 집중하실 수 있었다. 나도 그에 맞게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부모님과 더 진솔하고 솔직한 대화를 하면서 서로 신뢰할 수 있는 건강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참 좋다.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