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by 곤 Gon

대학생 시절 활동하던 동아리 단체의 건물이 학교 정문 건너편에 있었다. 수업을 마치면 주로 그곳에 가서 놀고 쉬고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건물 뒤편에는 바닥이 시멘트로 덮여있는 작은 뜰이 있었다. 다른 건물과 사이에 아늑하고 하늘을 볼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어느 날 오래된 바닥 시멘트 나 있던 균열 사이를 비집고 식물 하나가 비죽이 기어 나왔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하루 중 아주 짧은 시간만 햇볕을 받으며, 빗물을 맞아가며 기어이 자라나 나무가 되었다. 매일 볼 때마다 넓은 이파리를 펼치며 눈에 띄게 키가 껑충하게 자라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녀석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고 그 작은 균열 속에서 쑥쑥 자라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특별히 물을 주거나 가꾼 것은 아니었다. 며칠 새 나보다도 키가 훨씬 크게 자란 녀석의 성장이 약간은 징그럽기도 했다.



무슨 식물인지 궁금했다. ‘모야모’라는 어플을 다운 받았다. 식물식별 AI 같은 게 없을 당시, 식물에 일가견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 같은 어플이었다. 사진을 찍어 올리면 그게 무슨 식물인지 대략 2~3분 내로 누군가가 답을 달아주었다. 녀석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니 금방 답이 달렸다. ‘가죽나무’라는 식물이었다. 자라는 속도가 빨라서 마치 대나무 같다고, 가짜 대나무라는 뜻에서 이름이 그리 붙었다고 했다. 이름부터가 재밌었다. 수업 마치고 동아리 건물에 오면 그 녀석을 한 번씩 쓱 쳐다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동아리 모임에서 내가 그 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뒤뜰에 있는 큰 나무 본 사람 있는지, 그 나무는 가짜 대나무 같아서 이름이 가죽나무인데 엄청 빨리 자라서 신기하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공대의 한 친구가 가서 보더니 그 식물이 거기 계속 있으면 바닥에 균열이 더 심해지기 때문에 얼른 죽여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했다. T발놈. 그러더니 어디서 또 톱을 찾아와서는 자기는 손에 아토피가 심해서 못한다고 나보고 자르라고 했다. 그래서 몇 명이 같이 나가서 내가 쭈그리고 앉아서 톱을 갖다가 녀석 줄기 밑동에 대고 그었다. 대여섯 번 톱질을 했나? 무슨 나무젓가락보다도 쉽게 썰려서 넘어졌다. 원래 톱질이 이렇게도 쉬운 거였나? 아무튼 녀석은 너무 허무하게도 죽음을 맞이했다.



한 선배가 나에게 이왕 톱을 든 길에, 옆에 있던 앵두나무를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잔가지 좀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바로 앵두나무의 손가락 만한 잔가지에 톱을 대고 쓱싹 하는데, 이게 안 잘렸다. 세상에 앵두나무는 너무나 단단하고 밀도가 높아 톱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래도 땀을 삘삘 흘리며 어찌어찌 잔가지들을 모두 정리해서 뒤뜰이 깔끔해졌다.



가죽나무의 밑동이 보였다. 빠른 성장을 자랑했던 가죽나무는 그만큼 엉성해서 톱질 몇 번에 쉽게 허리가 끊어지는 나무가 되었다. 더디게 자라고 차곡차곡 그 자리에서 몇 년째 내 키보다도 작게 자란 앵두나무는 잔가지조차도 톱질에 진땀을 빼게 만들었다.



요즘 나는 내가 빨리 성장하고 뭔가 눈에 띄는 성취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마흔 살이 넘어서도 아직도 허덕거리면서 사는 현재의 내가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죽나무의 경이로운 성장이 눈길을 끈다. 하지만 그만큼 단단하지 못한 줄기는 쉽게 끊어지고 넓은 잎은 말라 떨어진다.



매년 초여름에 앵두 열매 맺기를 기다리며 사계절을 타박타박 견뎌온 단단함을 본받아야겠다. 100세 시대라는데 아직 반도 안 살았다. 급하게 만든 그릇은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기포가 생기고 금이 가고 그래서 깨져버린다. 앵두나무처럼 밀도 높은 그릇을 다시 차근차근 빚어보자. 한 번 굽다가 깨뜨려 봤으니, 다시 더 좋은 그릇을 빚어볼 수 있지 않을까? 대기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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