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빅이슈코리아 Jan 15. 2020

[칼럼] 장영실의 아버지는 조선인이 아니었다

꼬마 장영실을 위하여


 성현석





장영실은 아버지가 중국 원나라 사람이었다. 세종대왕이 직접 한 이야기다. <세종실록> 61권 1433년(세종 15년) 9월 16일자 기사를 보면, 세종이 이렇게 말한다.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이주 노동자였다    

요즘으로 치면, 장영실은 이주 노동자인 아버지와 하위 계층 어머니를 둔 말단 기능직 출신으로 고위 공무원이 된 사람이다. 그런데 많은 책과 영화가 장영실의 출신을 애매하게 묘사한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아예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에 대해선 기생이 아니라 노비였다고 표현하곤 한다. 만 원짜리 지폐에도 그려져 있는 한국의 위인, 세종대왕이 직접 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데, 굳이 사실을 왜곡한다.      

위인전에 나오는 과학자 장영실이 중국 혈통이라면, 그게 숨길 일인가. 위인의 어머니가 기생이었다고 가르치면 안 되는 건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일민족 신화야말로, 근거가 없는 허구다. 노비의 자식이 성공한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기생의 아들이 위인이 됐다고 가르칠 수 없다면, 그건 나쁜 교육이다.      

우리는 왜 장영실의 부모에 대해 숨기기만 했던 걸까. 어쩌면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본다. 과학사학자들은 세종 시기에 설치된 천문대인 간의대가 당시 기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가한다. 일본 도쿄 대학교가 펴낸 <과학기술사 사전>에 실린 세종 시기의 과학기술 업적은 15건이다. 같은 시기 중국의 업적은 3~4건이다. 일본은 아예 없었다.      

이 같은 성취가 꼭 세종과 장영실의 천재성 때문이었을까. 과학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 역시 아니다. 세종 시기를 대표하는 과학자를 굳이 꼽자면, 장영실보다 이천, 이순지 등을 앞세워야 한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천은 혼천의, 앙부일구 등 천체 관측 기구를 만든 책임자였다. 그는 구텐베르크보다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어 활용했다. 무신이었던 그는 화약무기 개발과 개량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순지는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조선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내외편>을 작성했다. 그 밖에도 다양한 학자들이 요즘으로 치면 이과 분야에서 활약했다. 농업 서적인 <농사직설>, 의약학 서적인 <향약집성방> 등이 이 시기에 출간됐다.      

실제로 조선 시대 내내 장영실의 활약은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역사학자들은 장영실이 주로 이천을 돕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런데 장영실이 갑자기 부각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다.    

  

근대화에 뒤처져서 나라 망했다는 콤플렉스     

세종 시기 조선은 세계적으로도 탁월한 과학기술 역량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역량은 계속 쌓이지 않았고, 정체하거나 퇴행했다. 그사이, 유럽은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근대에 도달했다. 그 성과를 먼저 흡수했던 일본이 조선을 병탄했다. 근대화에 뒤처진 결과 식민지가 됐다는 열패감은 조선 역사를 다시 살피게 했다. 정작 조선 시대에는 큰 주목을 받지 않았던 장영실이 다시 조명됐다. 신분의 한계를 깨고, 과학기술 분야에서 선진국보다 앞선 성취를 했던 장영실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인 모델이었다. ‘우리 역사에도 아주 일찍 근대적인 전문가 모델의 맹아가 있었다’라는 믿음은 식민지 콤플렉스를 씻어주는 면이 있다.      

이처럼 새롭게 발굴된 장영실은 식민지 지식인들의 취향에 딱 맞는 방식으로만 조명돼야 했다. 순수 한민족 혈통이 아니라는 점을, 그래서 다들 외면했다고 본다. 또 봉건적인 신분 차별을 깼다는 점을 극적으로 부각하면서, 여전히 봉건적인 당시의 정조 관념에도 부합하려면, 장영실의 어머니는 기생이 아니라 노비여야 했다.       

아울러 질문도 봉쇄됐다. 교육 수준이 낮았던 장영실은 어떻게 뛰어난 기술 역량을 갖출 수 있었을까. 앞서 장영실의 업적은 과대 포장됐다고 했다. 이는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에 비해 업적이 적다는 뜻이지, 독자적 업적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소개한 <세종실록> 기사에서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장영실이)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     

물시계인 자격궁루(자격루)는 장영실의 작품이다. 그리고 세종의 발언에서 드러나듯, 아주 뛰어난 수준이었다. 이런 성취는 타고난 손재주나 노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과학 및 공학 지식이 뒷받침돼 있어야 가능하다.      

장영실은 이런 지식을 누구에게 배웠을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답은 아버지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에서 물러나고, 명나라가 들어선 시기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뀐 때의 거의 겹친다. 이 과정에서 원나라의 엘리트들이 대거 한반도로 넘어왔다. 고려의 왕은 원나라 황제의 사위였는데, 고려왕의 부인인 원나라 공주와 함께 한반도로 건너왔다가 눌러앉은 중국 지식인과 전문가들도 많았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장영실의 아버지 역시 이런 부류 가운데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장영실의 과학 및 공학 지식은 뿌리가 몽골에 닿아 있다. 그리고 전성기의 몽골제국은 한반도부터 중동까지를 아우르는 세계 제국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노래 <쌍화점>이 당시 풍경을 잘 묘사했다. 아랍 상인들이 고려까지 와서 장사를 했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 예술의 성취가 서로 섞였다.      

단일민족 신화에 대한 강박 때문에, 혹은 식민지 콤플렉스 때문에 장영실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에 눈 감는 순간, 우리는 아주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세종 시기의 성취, 그리고 장영실의 업적은 어쩌면 당시 사회가 다른 문화에 대해 열려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실제로 조선 초기엔 아랍 사람들이 궁궐 행사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을 세운 이들은 중국에서 원과 명이 교체하는 시기에 명을 지지했던 이들이다. 원나라, 즉 몽골제국을 지지했던 이들은 조선 개국 집단의 정적이었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세종실록> 기사는 세종이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물시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망해서 중원에서 쫓겨난 왕조,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적대했던 왕조인 몽골제국의 성취에 대해서도 세종은 큰 편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장영실 선배

올해는 3.1운동으로부터 101년 되는 해다. 그리고 해방으로부터는 75년 되는 해다. 근대화에 뒤처져서, 혹은 과학기술 역량이 부족해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열패감은 이제 내려둘 때가 됐다. 이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세상과 역사를 보면, 이제껏 눈에 띄지 않았던 교훈이 선명해진다. 그래서 최근 개봉한 영화 <천문>이 몹시 아쉬웠다. 장영실과 세종이 주인공인데, 강대국에게 휘둘리는 약소국이라는 콤플렉스가 영화를 이끌었다. 장영실이 위대하다면, 그 이유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장영실을 새로 조명해야 한다면, 그가 선진국보다 아주 먼저 근대과학에 도달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는 역사 기록에도 맞지 않고, 현실에서 큰 의미를 지니기도 어렵다.      

굳이 장영실을 기념할 이유를 찾자면, 2020년 이 땅에서 살아가는 꼬마 장영실들을 위해서라고 하겠다. 이 땅의 숱한 다문화 가정 아이들, 혹은 딱히 자랑하기 힘든 부모를 둔 아이들이 ‘장영실 선배’를 보며 당당해지기를 기대한다. 피부색이 나와 다른 그들 가운데서 21세기의 장영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성현석  

언론인. 16년 남짓 기사를 썼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글을 써보려 합니다.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현재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 티모시 샬라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