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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Jan 19. 2020

[서울 동네] 연남동, 리틀 차이나의 흔적


김선미 

사진 양경필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우편물이 도착했다. 매달 쌓이는 얼굴 모를 중국인 앞으로 온 우편물. 이사 온 첫 달부터 지금까지 전전 거주자의 우편물을 버리지도, 열어보지도 못한 채 모아두고 있다. 그 중국인은 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았을까. 어떤 이유로 연남동을 떠났을까.      


땅은 머무는 사람들에 의해 그 결이 만들어진다. 부쩍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진 연남동은 사실, 오래전부터 여러 경로로 모여든 사람들이 한데 엉켜든 땅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화교라 불리는 중국인이 있다.      


연남동에

중국 음식점이

많은 이유


지금은 전 세계 음식들을 다 만나볼 수 있는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지만, 과거 연남동은 중국음식점과 기사식당으로 유명한 동네였다. 그중 매화, 향미, 하하, 구가원, 송가 등 연남동의 터줏대감 같은 중국음식점들은 아직까지 연남동의 ‘핫 플레이스’의 명성을 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재오픈한 하하에서 가지튀김을 맛보려면 평균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왜 유독 연남동에는 오래되고 유명한 중국음식점이 많을까.      





1969

한성화교중고등학교

이전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인 1969년. 박정희의 군부독재가 가속화되던 무렵, 연남동 바로 옆 서대문구 연희동 79-1번지에 한성화교중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말 그대로 화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다. 1909년 만들어진 경성화교소학교를 전신으로 1949년 명동 중국대사관 안에서 개교한 한성화교학교는 1960년대 말 학생 수가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등학교만 명동에 남겨두고 중고등학교를 연희동으로 이전한 것. 이때부터 자연스럽게 화교들이 연희동, 연남동에 모여들었다. 당시 정부는 화교들이 토지 소유를 할 수 없게 제도화했기 때문에 사실상 요식업 말고는 할 수 있는 사업이 없었다. 연남동에 터를 잡은 화교들이 중국음식점으로 생업을 이어나갔고, 맛집으로 소문이 나면서 상권이 확대되었다. 연남동 내에는 화교를 대상으로 하는 식료품점과 중국음식점이 연이어 문을 열기 시작했다. 또한, 비교적 공항과 가까워 동남아, 대만 등으로 다양한 물건을 수출하는 화교 무역업자들이 연남동에 사무실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연남동은 리틀 차이나타운으로 불리며 많을 때는 서울 화교의 4~50% 이상을 수용하는 마을이 되었다.      





대만을

국적으로 한

구화교

화교는 ‘해외에 이주한 중국인 가운데 중국 및 대만 국적을 그대로 보유한 중국인’을 의미한다. 근현대 역사에서 화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유입된 건 1882년 임오군란 이후다. 서울에 진입한 청군을 따라 함께 들어온 중국인들은 이후 명동, 소공동, 관수동에 정착하며 차이나타운을 형성했다. 이곳은 1960년대 전까지 번성했으나 이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 화폐개혁 등 제도적 제한과 차별을 받으며 점차 쇠락해갔다. 3대 차이나타운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또한 한성화교중고등학교가 연희동으로 이전하며 연남동과 연희동 일대에 새로운 화교 커뮤니티가 생기기 시작한다.  


연남동, 연희동에 정착한 화교들은 주로 중화민국(현 대만) 국적을 가진 구화교들이다. 대부분 중국 본토 출신들이나 1949년, 공산당이 중화민국의 국민당 정부를 대만으로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을 건국하는 바람에 대부분 국적은 종전의 중화민국으로 되어 있다. 대만과 중국, 한국 사이에서 애매하게 놓인 이들. 이와 달리 1992년 한국이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고 한중수교를 맺은 이후 대한민국에 새로 들어온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중국인을 신화교라 부른다. 

     

리틀 차이나의

심장부,

한성화교중고등학교 

올해로 개교 72주년을 맞이하는 한성화교중고등학교는 원래 구화교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으나 현재는 신화교 학생들도 함께 공부한다. 이곳의 교과과정은 대만과 같고 교과서 등 교재 또한, 대만 정부에서 무상으로 제공받고 있다. 때문에 중국의 간체자(간략하게 표기한 한자)가 아닌 대만의 번체자(우리나라와 동일한 표기법의 한자)를 사용한다. 단, 일주일에 정해진 시간만큼은 한국어를 공부한다.  


얕은 초입의 언덕배기를 지나면 교정이 펼쳐지는데 언뜻 보면 우리나라 학교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교정 초입에 세워진 공자의 동상이 중국인 학교임을 증명한다. 





공자의 동상을 거치면 본교 양옆에 또 다른 두 개의 동상이 보인다. 한쪽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 장제스, 다른 한쪽은 중국 혁명의 지도자 쑨원이다. 자세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이 동상들은 사실 명동 중국대사관 내에 세워져 있던 동상들이다. 1992년 8월 23일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게 되자 공관은 폐쇄되었고, 오갈 데 없는 이 동상들을 한성화교학교 연희동 교정으로 옮긴 것. 현대사의 굴곡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화교는 유년 시절 이곳을 거친 후 대만의 대학에 진학하거나 외국인 입학전형으로 한국 대학에 들어간다. 학교가 파한 후 타박타박 걸어 친구 어머니가 하는 만둣집에서 간식을 먹고 삼삼오오 무리 지어 하교하는 길. 어느새 연남동, 연희동에서 3대째 살고 있는 화교들은 연남동의 터줏대감이 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그 수는 현저히 줄었다. 몇 년째 발송되고 있는 우편물의 주인인 TSANG(중국 발음으로 쟝) 씨 성의 중국인도 이곳에 머물다 어딘가로 떠난 화교이지 않을까.    

      

리틀 차이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연남동

흔히 한국을 ‘제대로 된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나라’라고 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인한 수교 및 대중 교역의 단절,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와 이후 한국 정부의 화교 탄압 등이 그 원인이다. 하지만 여기 연남동에는 리틀 차이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시세가 수직상승한 연남동 건물들의 주인 중 화교가 꽤 많다는 사실도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급변하는 공간의 이력,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3대째 흔들리는 뿌리를 심어온 사람들. 이 땅은 그 뿌리를 어떻게 머금고 있을까. 연남동의 또 다른 결을 만져본다.      





김선미  

서울 연남동에서 기획 및 다자인 창작집단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를 운영하고 있다. 단행본 <친절한 뉴욕>, 

<친절한 북유럽>, <취향-디자이너의 물건들> 

<베이징 도큐멘트>를 썼으며 <한겨레신문> 등에서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는 1930년대 

한국 근대 잡지에 관한 단행본을 집필 중이다.


위 글은 빅이슈 1월호 21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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