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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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아침잠에서 깼다. 이국에 와 있음이 실감났다. 숙소 밖으로 나와 야자수가 끝없이 이어진 정원을 걷다가 목조 테라스가 있는 이층 주택의 흰 기둥에 붙은 도마뱀을 보았다. 도마뱀은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마치 조그만 돌 부스러기처럼, 오래된 가문의 문양처럼, 그렇게 영원할 것처럼. 그리고 도마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긴 세월 동안 멈춰 있던 시곗바늘이 알 수 없는 힘으로 째깍, 단 한 번 움직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거룩한 일은 때론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지고 그런 이유로 인간을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만든다.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가 자연이 내어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애썼으나 그들 모두는 대체로 무너졌다. 스스럼없이. 스스럼없는 무너짐. 나는 그것을 꿈꾸고 있다.
인간이 자연에 느끼는 경외감은 그것이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살아남게 되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도마뱀의 꼬리는 순간의 메타포가 아니라 영원의 메타포다. 자연에 던져지고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에 몰입하여 마침내 자연에 포함되어버리기까지 인간은 얼마나 많은 과오를 범하게 되는 걸까.
나는 지난날을 지난날과는 별개로 대부분 후회한다. 그때의 후회는 산을 오르다 말거나 강을 건너다 돌아오는 것에서 오는 후회와는 다르다. 그 후회는 이를테면 벌어지지 않은 일에 관한 후회다. 가령, 사랑하는 이가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춰버리는. 혼자 남겨지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많은 사람은 단 한 번도 후회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지난날, 나는 F에게서 사랑받지 못했고 동시에 E의 구애를 받았다. 그것은 후회가 남는 일이었다. F와 E와 나는 서로에게서 계속해서 버림받았다. 혼자 남겨지는, 돌이킬 수 없는. 자연은 가장 크고 넓고 은밀한 고해의 장소이다.
나는 오랜만에 자연에 심취했다.
한국을 도망치듯 빠져나오면서는 꿈꾸지 못했던 일이다. 스스럼없이 무너져 내리기. 아침은 무너져 내리기 좋은 시공간이다. 밤의 신비가 서서히 옅어지는 아침에 우리는 거울을 보며 자주 자기에게 속삭인다. 끝났다.
야자수 정원의 끝에 다다르자 고운 모래사장이 드넓게 펼쳐졌다. 그곳에서 뒤를 돌아본다면, 원주민 여인들이 입을 법한 화려한 무늬의 가운을 걸치고 잠이 반쯤은 덜 깬 표정으로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선 젊은 적 마르그리트 도나디외(편집자주_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본명)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녀는 해변을 향해 희고 긴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다. 1914년 베트남 지아딘에서 태어난 그녀는 언제나 ‘연인’을 썼다. 아니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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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 앉아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일까.
희고 깨끗한 욕조를 바라보고 있으면 괴이한 열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곳은 몽상의 장소이다. 연인과 발가벗은 채로 무릎을 구부리고 마주 앉는다. 욕조 밖으로 떨어진 손목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욕조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사랑과 작별의 장소였으므로 그곳에서 수많은 예술가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비극을 창조해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욕조의 비극은 마르그리트 도나디외의 비극이다.
그녀는 노년에 알코올중독과 간 경화를 겪으면서 글을 썼다. 피를 토했고, 와인을 마셨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그녀는 술독에 빠졌다. 그녀는 연인에게 구원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그 어떤 연인도 그녀를 구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흔 살이던 1980년 1월의 어느 날, 그녀는(어쩌면 욕조에서) 정신을 잃었다. 한밤중에 생제르맹앙레 병원에 실려서 갔고 병원에서 돌아와 ‘얀’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녀에게 와도 되냐고 물었고, 그녀는 오라고 했다. 그녀는 ‘편지’라는 짧은 글에 “사랑은 늘 살아간다. 최악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런 그녀도 욕조에서 생을 마감하지는 못했다. 욕조에서 마감하는 생은 대체로 술과 담배,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인생은 치정에 더 밀접해 있다.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치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단 한 번 후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1996년에, ‘이게 다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스스럼없이 무너졌을 때, 아직 더 사랑할 수 없음으로.
아침 해변에서 우리는 언제나 지평을 보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 범람하는 물소리를 듣다가 한국에 머물고 있는 오랜 연인이 기억났다. 그는 벌거벗은 채 밧줄로 묶여 있고, 나는 욕조에 물을 채우고 있다.
사랑은 분명한 사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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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에서 나와 다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물기 때문에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계단의 끝에서 뒤를 돌아보면 그 발자국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다. 그때 느껴지는 아니 발견하는 서늘함을 누군가는 운명으로 여겨 한밤에 글을 쓰게 되기도 한다.
이제 여기 없는 마르그리트 도나디외 부인이 매일 밤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울부짖지 않았고, 웃지 않았다. 연인들의 이름을 되뇔 뿐이었다. 운명처럼 작은 새 한 마리가 목조 테라스 난간에 날아와 앉는다. 새는 통통 튀는 음표처럼 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유리창 너머, 나무 계단을 오르는 나의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그 작은 새는 물론 죽음을 보는 새다. 그 새는 곧 연기처럼 사라진다. 마르그리트 도나디외의 젊을 적 담배 연기처럼. 그리고 잠시 뒤에 나는 하얀 베개를 베고 누웠다. 그 베개에는 크림색 실로 이런 문양이 새겨져 있다. 편히 잠들게 하소서.
그리고 나는 시계를 보고 아직 아침임을 깨닫고, 연인을 떠올리고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물질적 삶>을 계속 읽기 시작했다.
재스민 향기.
향수에 젖는 사람들은 쉬이 들키고 만다. 그들의 얼굴에 이미 그 향수의 발원지인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어서다. 연인들의 눈동자가 그토록 빛나는 것은 그들만이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향수에 빠지기 때문이다. 너에게로 갈래. 사랑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김현
읽고 쓰고 일한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질문 있습니다> <아무튼, 스웨터>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있다.
위 글은 빅이슈 2월호 22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