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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Feb 21. 2020

[뮤지컬] 역사는 여옥의 얼굴을 하지 않았기에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글·사진 양수복     



여옥의 곁엔 아무도 없다. 위안부로 끌려간 난징 일본군 부대에서 만난 조선인 학도병 대치는 달콤한 탈출의 꿈을 심어주지만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연인의 백일몽은 이뤄지지 못한다. 여옥은 자신의 보호자가 된다. 뱃속에 있는 대치의 아이를 위해, 대치와의 재회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다. 역사엔 수많은 ‘여옥들’이 있었다. <여명의 눈동자>는 역사에 할퀴어진 여옥들을 위한 헌사이다.


한국 현대사의 곡절을 살아낸 여옥과 대치의 이야기를 담은 <여명의 눈동자>(1991)는 시청률 50%를 돌파하며 ‘국민 드라마’로 회자됐다. 위안부와 제주 4.3사건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설정했고 이는 뮤지컬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작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초연된 데 이어 올해는 대극장으로 옮기고 앙상블도 두 배 규모인 41명으로 꽉 찬 무대를 예고했다. 


극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들과 공산당원 대치의 아내라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재판에 넘겨진 여옥의 모습을 교차하며 이념으로 날조된 역사 속에서 소외되는 무력한 개인, 여옥의 비극에 초점을 맞춘다. 


위안소를 나와 미군 아래서 요원으로 일하던 여옥은 대치와 재회하며 새 삶을 꿈꾼다. 그러나 대치는 평화를 찾아 건너간 제주에서 4.3이 벌어지자 가족을 두고 무장대에 합류한다. 그런 대치에게 여옥은 “나를 위한 선택이라 말하지 말아요. 당신의 선택이에요”라고 선 긋고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 교차하던 여옥과 대치가 평행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때다. 토벌대의 무차별적인 총질에 아들을 희생당한 여옥은 무너진다. 또 한 번 역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여옥의 눈엔 희망이라곤 남아 있지 않다. 


이때 “내 이름은 윤여옥. 고향은 남원. 춘향이가 살았던”이라는 위안소에서의 여옥의 첫 대사를 다시 떠올렸다. 아직 희망이랄 게, 감정이랄 게 존재하던 때 여옥이가 기억하고 싶었던 자신의 이름과 수많은 여옥들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위안부 생존 할머니가 20명인 지금, 역사에 지워진 여성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어느 때보다 더욱 소중하다. 


한편 뮤지컬 속 민중의 역할을 맡은 앙상블의 활약도 기록할 만하다. 광복을 기뻐하는 민중, 여옥을 손가락질하는 해방 후 여론 등으로 다채롭게 변모하는 41인의 앙상블은 합창과 군무로 대극장 뮤지컬로서 <여명의 눈동자>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기간 2월 27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위 글은 빅이슈 2월호 22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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