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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Feb 24. 2020

세상은 내 월급을 알고 있다

사회 초년생의 '알바'하며 겪은 차별


황소연



팥빙수 가게에서 난생처음 아르바이트를 할 때, 불과 2주 만에 ‘잘렸다’. 당시 최저임금이 3,770원이었는데, 시급을 맞춰줄 수 없다는 사장과 논쟁을 벌이고 말았다. 수기로 기입한 숫자로 빽빽한 가게 장부를 매만지며 사장이 말했다. “딸처럼 생각했는데 이렇게 따지고 드니 내 마음이 불편하네.” 최저임금을 주지 않은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임대료 내기도 빠듯해서, 재료비가 늘어나서, 아니면 내가 못 미더워서. 인건비가 너무 아까웠을 터다. 어쨌든 이후로 ‘알바 노동자’로 살면서, 비슷한 상황이 계속 생겼다. 사장님이든 손님이든, 언제든 나를 막 대할 수 있는 근거가 ‘사람 값’이 싼 현실임을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세상은 내 월급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나의 불안정한 고용 지위를 흔들 수 있는 이유였다.


‘알바’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명칭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뛰고, 그만두지만 사람들은 단시간 노동자를 ‘알바’로 통칭한다. ‘알바야~’ 하고 부르는 손님도 많다. ‘학생’처럼 ‘알바생’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을 정도니까. 편의점 노동자의 “봉투 드릴까요?”라는 말에 한 손‘놈’이 “그럼 손으로 들고 가라고?”라고 비꼬았다는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음료는 따뜻한 것 맞으세요?”라는 물음에 “그럼 찬 거 먹고 얼어 죽으라고?”라고 대답하는 손‘놈’도 진짜 있다. 2014년 청년유니온이 발표한 ‘아르바이트 청년 감정노동 실태 조사’에 따르면, 고객에게 한 번 이상 무리한 요구 및 신체·언어적 폭력, 성폭력을 경험한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73.3%에 달한다. 이들은 손님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에도 자주 노출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차별에 노출되지만 이것을 제어하거나 끊을 힘이 ‘알바’에게는 없다. 알바 노동자들의 요구는 웃어달라거나 큰 아량을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노동자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저 사람으로 대해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장 불러와”라는 말을 들은 때가 생각난다. 아이스크림 체인점에서 일하던 나는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동료를 손님에게 안 보이게 반대쪽 손으로 토닥토닥 달래야 했다. 동료가 손님에게 외쳤다. “저도 사람이거든요!” 상황을 무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나중에야 그 항의를 곱씹었다. 그러게, 우리도 사람인데. 함께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손으로는 동료를 달래고, 손님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매장에 사장님 휴대폰 번호가 없다’는 어설픈 핑계로 상황을 벗어났지만, 누군가 나에게 호통치고 비꼬는 것을 감내하는 것을 ‘서비스’의 일부로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노동환경이었어도 손님이 우리에게 소리를 지를 수 있었을까 상상했을 뿐이다. 


어렵사리 잡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노동자들은 차별적 상황을 꾸역꾸역 삼킨다. 오픈을 앞둔 작은 카페의 사장님은 나에게 늘 잘해주셨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온 경력이 길어서 당시 최저임금보다 좀 더 높은 시급을 받게 되었던 나에게 사장님은 엄포 아닌 엄포를 놓았다. “일 못하면 시급 다시 깎을 거야~.” 사장님은 정말 ‘선량한’ 사람이었다. 일한 지 한 달하고 2주 만에 해고를 통보받았다. “금요일에 말하려고 했는데 입이 안 떨어져서….” 사장님은 인건비도 안 남는다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다른 타임 직원들도 소식을 들었는지, 나에게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살아남았을까?


위 글은 빅이슈 2월호 22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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