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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May 02. 2020

[가만히 많이] 이 시국에 하필


이진혁          



이 시국에 하필 그 나라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눈살을 찌푸리실 분도 있겠습니다. 1995년에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는 배경을 2029년으로 설정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사람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소통되지는 않는 가까운 미래.” 얼핏 듣기론 2020년인 지금보다 못하지 않냐 싶지만, 이야기 속 인물 상당수는 몸의 일부 또는 전부를 기계로 바꿔버린 상태입니다. 


암세포가 생명이 아니듯이     

“과학은 아직 생명을 정의할 수 없다.” 이 부정문을 내뱉은 건 ‘인형사’라는 캐릭터인데, 어느 날 자의식을 가진 데이터가 등장합니다. 당시에 구글 알파고가 있었다면 이해가 빨랐을 테지만, 컴퓨터 바이러스가 세상을 끝장내리라던 세기말에 그것은 그저 ‘바이러스’ 같은 거라고 여겨졌죠. 그 존재는 생명체로 인정받기를 바랐으나 결국에 실패합니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니냐고요? 그런데 저 세계에서는 사람의 몸이 얼마든지 기계로 대체되니까, 인형사에게 그럴듯한 몸을 만들어준다면 그걸 생명체로 봐야 할지 아닐지 헷갈릴 만했을 겁니다. 


생명을 정의하기 어려운 건 그게 꼭 과학적 문제라서는 아닙니다. 철학적이기도 하고 역사적이기도 해서죠. 불세출의 드라마 작가 임성한이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화두를 던진 게 2013년이니 이런 식의 해묵은 이야기는 비교적 최근까지 이어진 셈입니다.(물론 비웃음만 샀지만요.) 그런데 ‘OO도 생명’에 익숙해진 탓인지 사람들은 이제 그런 접근법에는 위화감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걸 요즘 많이 느끼는데, 미디어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코로나바이러스” 하고 떠들 때 특히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면 화가 나기도 하고 조금 웃음이 나기도 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그 말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바이러스를 생명체로 여기는 것 같은 태도 때문입니다.  (중략)


일반화된 오염의 시대에서     

체념에서 공포와 분노가, 마치 바이러스처럼 번식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소독과 방역에 관해서라면 철저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코로나19를 계기로 사회를  ‘무균 상태’로 만들어야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그런 편집증적 광기가 이 질병에 인격과 생명을 부여하는 것 같고, ‘일본을’ ‘대구를’ ‘조선족을’ ‘쓸어버리라는’ 악마적이고도 원시적인 주술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회학자 이진경은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접속의 시대는 일반화된 오염의 시대”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접속에도 오염에도 좀 더 담대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손 씻기와 마스크 착용 등에는 철저해야겠지만요. 


오늘은 친구들과 화상회의 어플리케이션에서 만나 한잔하기로 했습니다. 각자의 시공간에서 함께할 완벽히 개별적인 술자리가 저는 기대됩니다. “사람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지만 완전히 소통되지는 않는 가까운 미래.” SF 속 2029년. 생각해보면 뇌를 서로 훤히 들여다봐도 완전한 소통이 안 된다는 뜻이니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그래도 지금 마실 입과 해독할 간과 이야기 나눌 친구가 아주 먼 곁에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게 됩니다. 


이진혁  

출판편집자. 밴드 ‘선운사주지승’에서 활동 중. 


위 글은 빅이슈 4월호 22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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