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진혁
요즘처럼 장마가 지나고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 과장이 OO에 면담이 있는데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죠. 잠도 오고 답답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있던 곳에서 OO까지는 서쪽으로 5km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철책을 따라 걸었습니다. 하늘이 참 파랬고 물빛도 깨끗했습니다. 사격장에서 나는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이었습니다. 이런 장면이 아직도 정지화면처럼 떠오릅니다. 정말,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5km를 걸어 과장은 면담을 하러 가고 저는 취사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면담은 30분 정도 이어졌죠. 다시 동쪽으로 걸었습니다. 면담은 어땠는지 물었고,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면담 대상자는 전입해 온 지 얼마 안 된 이등병이었습니다. 나쁘지 않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초소에서 근무를 서던 그 이등병은 총구를 자기 턱에 놓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자정이 조금 넘은 때였고, 저는 거기서 8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새벽에 알았고, 중대장이 ‘불행한’ ‘사고’에 대해 설명했고, ‘철저한’ ‘입단속’을 당부했습니다.
저는 보급병이었습니다. 제 상관이 저를 찾아와 옷 입고 따라오라고 말했습니다. 망자의 보급품을 회수해 와야 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때 그 말투와 목소리가 또렷이 기억나지만 여기에 옮겨 적지는 않겠습니다. 모두가 신경이 예민했을 때니까… 저는 모든 것을 이해해보려 합니다. 통째로 가져온 이등병의 물품 가운데서 보급품을 분류했습니다. 커다란 가방 안에는 세면 바구니, 책 몇 권, 뜯지도 않은 포카칩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뜯지 않은 양파맛 포카칩은 가장 큰 크기였는데, 그걸 쓰레기봉투에 넣을 때는 무척 슬펐습니다. (중략)
피 흘리는 주인공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는다지만 집에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주말 아침에 샤워를 하다가 갑자기 샤워부스가 폭발하듯이 깨졌거든요. 깨진 유리 파편이 몸을 훑고 지나갔는데 ‘복합자상’은 드라마에나 나오는 용어인 줄 알았죠. 급한 대로 대충 옷을 입고, 피 나는 곳을 수건으로 눌러가며 응급실로 갔습니다. (중략) 피가 슬리퍼에 고이는 것을 보는데 왠지 웃음이 났습니다.
왜 웃음이 자꾸 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많은 다친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처참하다는, 그래서 제일 주목받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특히 사회생활을 한 이후로는 주목받을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자꾸 웃음이 나서 나중에는 ‘다른 환자도 있으니 좀 그만 웃으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뭔가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는데, 돌이켜보니 그저 한 마리의 ‘진상’이었던 것 같네요.
주인공이 불교 용어라는 건 며칠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외부 환경과 번뇌망상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자아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비춰보니 저는 주인공이 되기는 글렀고, 부처님이 들으시면 여섯 번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는데 그 이등병이 떠올랐습니다. ‘피’라는 물질과 ‘번뇌망상’이라는 비물질이 합쳐져서였을까요. 오랜만에 그 화창한 하늘과, 철책과, “잘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습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에스겔 16:6) 종교도 없는 제가 부처님 말씀만 해서 서운해하실까 봐 성경책을 넘기다 이런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가혹한 시기가 끝나지 않네요. 모두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이진혁
출판편집자. 밴드 ‘선운사주지승’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