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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Nov 11. 2020

낮을 연기하는 배우

글/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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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순식간에 타올라 오두막을 태운다.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 사랑의 불길을 바라보며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본명)는 I, O, Y 중 누가 먼저 밖으로 뛰쳐나올지 기다리고 있다. 그 사람에게서 시작되는 사건.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여름비’라는 제목의 소설을 구상 중이다. 세차게 쏟아지는, 흠뻑 적시는, 꺼버리는, 모든 걸 수포로 만들어버리는 격정에 관하여. 그녀가 가진 것은 첫 문장뿐이다.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다. 


‘(  )는 도망쳤다.’     


꿈꾸는 마르그리트 도나디외와 꿈속의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를 연기하는 두 사람을 보는 건 관객의 몫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도 객석에 앉아 있다. 그녀는 꿈속의 마르그리트 도나디외가 더 마음에 든다. 그이가 더 불쌍해 보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욕조에서 잠이 든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극적 연출과 상관없이 ‘숭고한’ 분위기를 풍긴다. 아무렴, 눈감은 사람의 얼굴은 모두 그렇게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 들게 하니까.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얀의 잠든 얼굴을 떠올린다. 재스민 향기. 짙푸른 눈동자가 사라진 얀. 얀을 얀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눈동자가 아니라 그 푸른빛이리니.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언젠가 얀에게 말했다.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사진을 찍어도 될까. 거기엔 영원을 담아둘 수 있으니까. 눈을 더 크게 떠봐. 내가 영원히 사랑하고 싶은 건 바로 그거야. 

무대 위의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들은 한 욕조에 있다. 불타는 오두막을 배경으로. 그리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 담배 냄새. 두 사람은 서로의 맞은편에 있는 존재를 응시한다. 누가 거울의 상일까. ‘나’와 ‘나’ 중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은 누구인가. 둘은 동시에 의문을 품는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리… 그리고 잠시 뒤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마그리트 도나디외를 찌른다.’ 

암전이 되자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녹색 가방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극장을 빠져나갔다.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관객은 모두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를 연기한 두 배우, 케이트 블란쳇과 줄리안 무어에 관해서 떠드는 중이었다.     

출처: Pixabay

관객 1: 봤어요? 마지막에 줄리안 무어가 일부러 손을 떨더라고요.

관객 2: 그랬어요? 놓쳤네요. 저는 케이트 블란쳇에 집중했거든요. 죽음이 더 드라마틱하잖아요.

관객 1: 그렇죠, 아무래도. 그래서 다음엔 어떻게 된다고 했죠?

관객 2: 이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나올 차례예요.

관객 3: 오, 드디어 퀸 메릴이 나오는군요!     


암전이 지나고 막이 열리자 녹색 가방을 든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그러니까 메릴 스트립이 갑자기 객석을 향해 소리친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야!”


1

들어올래요?

I가 말했다.

들어와요.

Y가 말했다.

아주 돌아온 건 아니에요.

O가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I와 O와 Y는 한 식탁에 둘러앉는다. I와 Y는 나란히 붙어 앉고, 그 맞은편에 O가 앉는다. O는 새와 돌이 반복적으로 수놓인 흰 테이블보를 매만진다. O의 것이다. 세이렌, 1979년, 에르메스, 앙리 도리니, 뮤리엘을 위하여. 그대로네요. O가 말했다. 이거뿐이에요. 그 집에서 가지고 나온 건. I가 말했다. 두 사람은? O가 물었다. 찾아왔어요. Y가 대답했다. 궁금했어요. 당신의 사랑이. I가 말했다. 사랑을 그리워했어요. 동시에. Y가 말했다. 중요하지 않아요. 더는. O가 말했다. 정말요. Y도 대꾸했다. I는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놀랍게도 O는 Y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건 Y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이고, 그 후 40년이 흘렀다. 두 사람의 콧날은 여전히 오뚝했고 광대뼈는 도드라졌으며, 눈빛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입술도 붉었다. 목소리는 또 어떤가. 특별한 건가요? 하고 묻던 그 특별한 목소리를 Y는 간직하고 있었다. 천진함은 또 어떤가.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녹여 먹던 O는 언뜻언뜻 예의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옛 감정의 불씨를 도무지 되살려내지 못했다.

O에게 흥미로운 건 I였다. I는 백발이 성성했고, 그 또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으며 등은 구부정했다. Y의 타고난 귀티 때문인지 I는 Y 곁에서 더 초라해 보였다. O는 I가 여전하다는 걸 직감했다. I는 변함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인 것이다. 그 천성은 I를 I이게 하는 본질에 가까운 것이니까. O는 I에게 묻고 싶었다. 떠날래요? 그러면 I는 대답할 것이다. 떠날까요? Y에게 묻는다면, 떠나요, 하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O는 I라는 돌과 Y라는 새를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세 사람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침묵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것을 한꺼번에 풀어놓듯이.

출처: Unsplash

2

지난밤에는 헤어진 연인 때문에 마음에 병이 생긴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환청을 듣는다고 했다. 그가 듣는 건 타인의 목소리일까, 자기 목소리일까. 델핀 클레르 벨티안 세리그와 M의 전화 통화를 녹음해둔 테이프를 카세트 플레이어로 재생해 들었다.

-여자는 내면의 소리를 말하고, 남자는 기억의 소리를 말하는 거예요.

-연인은요?

-침묵하죠.



김현/ 읽고 쓰고 일한다. 시집으로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으로 <걱정 말고 다녀와> <질문 있습니다> <아무튼, 스웨터>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어른이라는 뜻밖의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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