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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Dec 10. 2020

초미세먼지 인간

“잘 가렴. 내 비밀은 바로 이거야.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지.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야.”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중에서


어느 봄, 녹음하느라 목을 많이 쓴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대학로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 있어 어디 들어가 있기도 뭐했다. 분명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했는데 내 눈에는 대기가 맑아 보이기만 했다. 그래서 전자책을 펼쳤다.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시간도 잘 가고, 어쩐지 시간을 잘 보냈다는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길바닥에서 막 큰 소리로 읽지는 않으니 이상하게 생각하진 말아주시길. 낮게 읊조리며 책을 읽었다. 그 결과… 


  감기에 걸렸다. 목을 많이 쓴 날은 조심해야 한다. 목이 너덜너덜하게 느껴지는 날 갑자기 찬 음료를 마시거나 나쁜 공기를 쐬면 훅 가기 쉬우니까. 그날 미세먼지가 왜 그냥 먼지와 달리 ‘미세먼지’인지, ‘초미세 먼지’라는 건 왜 또 따로 있는지 심하게 앓으며 절절히 깨달았다. 기침을 사정없이 해대며 아주 사소한 것 때문에 무너지는 게 <우주전쟁>에 나오는 화성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출처: Unsplash

  <우주 전쟁>은 원래 허버트 조지 웰스의 SF 소설이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드라마로도 나오고 그랬다. 오슨 웰스가 라디오 드라마로도 만들었는데, 처음에 드라마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사람들이 화성인이 실제로 침공한 줄 알고 혼비백산해 난리가 났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웰스는 감독, 각본, 제작, 목소리 연기까지 전부 맡아서 생방송으로 이 드라마를 송출했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으면 사람들이 실제 상황인 줄 알고 사재기를 하고 피란을 간 건지 신기하다. 1938년의 일이니 어쩌면 온 세상에 감돌던 전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지금보다 사람들이 순진한 탓이었을까.


  요즘은 워낙 가짜 뉴스가 많고 의심이 가득한 세상이라 사람들이 라디오 드라마를 듣고 혼비백산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눈으로 본 것조차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시대다. 내가 직접 본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니 나도 예보를 무시한 채 길 위에서 그러고 있지 않았겠는가.

  감기는 성우에게 특히 괴롭다. 열이 나고 아픈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목소리가 변해버린다. 

  “어! 규혁 씨, 감기 걸렸어요?”

  토크백(녹음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말할 때 쓴다)이 열리고 PD의 불안한 음성이 들려온다.

  “아… 감기 기운이 있는데, 소리가 많이 다른가요?”

  내 음성은 더 불안하다. 그러잖아도 축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간신히 시사를 하고 녹음실에 왔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느낌. 그나마 고정 시리즈 배역이라면 한 주 정도 미루거나 해서 조정이 가능하지만, 최악의 경우에는 교체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면 온 우주가 내게 태클을 거는 것만 같다.


  중학교 때 과학 선생님이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 설명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는 미세한 가루 같은 존재이니 이런 가루들 사이에 생기는 작은 일 가지고 싸우지들 말라며 도인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그렇다. 우주적인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초미세 먼지도 못 된다. 눈에 뵈지도 않는다.


출처: Pixabay

  그 조언을 뒤로한 채 난 여전히 사소한 일로 예민해진다. 그때마다 일종의 자책감 같은 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 자책감은 그러잖아도 먼지 같은 날 더 작게 압축한다. 이러다 정말 사라지고 말 것만 같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딘지 이상하다. 우리가 그렇게 작고 하찮은 존재라면 도대체 어떻게 하늘 같은 마음을 품으란 말인가. 벼룩의 가슴에 사자의 심장을 담을 수 있겠는가. 사소한 일로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을 무슨 지구촌 공동체의 영원한 화두처럼 섬기는데, 도대체 우리에게 사소한 일이 아니면 발끈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다.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 작고 하찮은 일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속이 상하는 것 아닌가. 소박한 바람조차 뜻대로 되지 않으니 마음이 아픈 것 아닌가 말이다. 우리 눈앞에 진짜 화성인이 나타나 괴상한 총을 쏘아댈 정도의 큰일이 생긴다면 오히려 서로 눈을 부라리던 사람들도 힘을 합치지 않을까. 


  나는 미세먼지를 마시고 감기나 걸리는 초미세 먼지 같은 인간이다. 아마 난 앞으로 대단한 위인은 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자책하지 않으련다.  난 앞으로도 열심히 사소한 일에도 일희일비하며 살 테다. 아니, 일희일비하더라도 열심히 살 테다. 난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사람이니까.


글/ 심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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