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밤에는 사랑해야 하니까.
얼굴을 볼 수 없으니까.
떠나야 해요, 돌아올 수 없으니까.
꿈을 꿔야 하니까.
1
유리스믹스(Eurythmics), Sweet Dreams(Are Made of This), 3분 42초
2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으로 다가왔다. 그리운 재스민 향기! 새하얀 커버를 씌운 침대 위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던져두고 집 밖으로 나섰다. 서늘한 공기와 푸른빛. 동이 트는 중이었고, 눈발이 약하게 휘날렸다. 가을을 거치지 않고 여름에서 겨울로 뛰어넘어온 기분이었다. 목조 테라스가 있던 이층 주택의 흰 기둥과 도마뱀, 드넓은 야자수 정원과 고운 모래사장.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해변을 향해 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던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본명)가 떠올랐다. 나는 베트남의 한 빌라에서 그녀, 혼과 지내는 동안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을 썼다.
누구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 집의 주인이었다. 그곳을 방문한 사람 모두가 머물다 떠났다. 그 집은 오랫동안 그런 용도로 쓰였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사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곳에 남은, 영원히 남겨지는 단 하나의 존재는 바로 그녀,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되기 전의 그녀.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이루는 영혼의 일부분. 그 희미하고 선명한 것을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마르그리트 도나디외가 밤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를 며칠째 숨 죽여 들었다. 그녀는 울부짖지 않았고, 웃음도 없이, 연인의 이름을 되뇔 뿐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그녀가 언제고 연인에 관해 말할 준비가 되었을 때 문을 두드리기를. 한 손에는 와인, 한 손에는 담배. 나는 촛불을 켜고, 라디오 주파수를 93.1MHz에 맞추고, 새 종이를 타자기에 끼우고 문을 열고 그녀에게 속삭일 것이다. 어서 와요. 제 이름은 얀입니다. 당신이 대화하고 싶은 사람.
그리고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목에 두른 팥죽색 목도리를 초록 체크무늬 외투 안으로 넣고 깃을 세워 올렸다. 걸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고, 이제 이 무대에 남은 사람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진 아내와 남편, 자식, 연인과 친구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었다. 그들 자신이 사라지기 전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누군가의 사랑과 존경과 보살핌을 받던 이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건 눈사태 때문이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죽음은 영원히 실종으로 기록된다. 남은 이들을 ‘사랑의 유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저 멀리 눈 덮인 산이 보였다. 언젠가 그와 내가 오르내리던 산이었다. 이 고장 사람들은 날개를 펼친 새의 형상을 한 그 설산을 대대로 ‘기러기산’이라고 불렀다. 공식적인 이름은‘새산’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모두 기러기산이라고 부르나요, 하고 아무에게나 물으면 누구 하나 똑같은 대답을 내어놓는 이가 없었다. 이름의 유래에 관해 모두 다른 구전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일 터다. 어린 시절, 내가 외할머니에게 들은 그 산에 얽힌 이야기는 이러하다.
곧 생을 마감하게 될 늙은 기러기에게 어린 산이 말했단다. 죽기 전에 당신의 영혼을 제게 주실 수는 없나요? 저는 이 세상이 무척 궁금해요. 제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가요.
공원으로 들어서자 눈발이 더 거세졌다. 공원의 호숫가를 걸었다. 걷다 보니 ‘사랑의 침묵’ 앞에 서게 되었다. 앞에서 보면 새의 얼굴, 옆에서 보면 사람의 얼굴, 뒤에서 보면 그저 바윗덩어리인 석상이었다. 그 바위 앞 벤치에는 두 남자와 한 여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처럼 보였다. 남자 옆에 남자가, 남자 옆에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그렇게 연결된 채 말없이 대화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세 사람 뒤에서 한 여인이 그들을 지켜봤다. 술에 취한, 담배를 피우는, 붉은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검정 뿔테 안경을 쓴, 터무니없이 작고, 끝없이 희미한, 죽음과 겨루는, 사랑에 빠진, 모든 것을 잃은, 언제까지나 쓰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내게로 천천히 다가와 이렇게 묻는.
“당신은 제가 보이나요?”
깊은 밤이었다.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벤치에 나란히 앉은 Y와 I와 O가 응시하는 곳에 불에 탄 사랑의 오두막 한 채를 적어 넣었다. 검은 잿더미로 변해버리는, 그들에게 밤을 선사하는. 해피엔드로 끝나는. 마르그리트 도나디외는 글을 쓰던 일을 멈추고 담배에 불을 붙인 채 와인을 들고 다락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흰 욕조가 있는 넓은 방의 문을 두드렸다. 열렸다. 재스민 향기.
“어서 와요. 제 이름은 얀입니다. 당신이 대화하고 싶은 사람.”
3
편히 잠들게 하소서. 나는 하얀 베개에 크림색 실로 새긴 글귀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너는 지금쯤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 꿈속에 내가 있다면 나는 너에게로 돌아갈 준비를 할 텐데. 어젯밤 나는 암초 위에 기러기가 내려와 앉는 꿈을 꾸었다.
너에게로 갈래. 사랑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그곳에 누가, 무엇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면서.
기러기는 떠나고 산은 남아 산은 기러기가 되고 기러기는 산이 된다.
4
그러니까 우리, 춤출래요?
고개를 들고, 정신을 차리고, 움직여요.
글/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