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가 피면 봄이 왔다. 여기서는 수선화가 그렇다. 공원에도 길가에도 여기저기 무리 지어 피어 있다. 봄은 진작에 왔는데, 외출을 삼갔던 나는 이제야 그걸 봤다. 이제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좋은 계절만 남았다.
한국에서는 수선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맞는 첫 번째 봄에야 이 샛노란 꽃이 수선화인 줄 알았다. 그전까지는 수선화가 고고하게 혼자 피는 꽃인 줄 알았다. 그런 이미지를 갖게 된 데는 이름이 한몫했다. 수선화(水仙花), 다포딜(daffodil), 나르시서스(narcissus)라는 이름은 개나리, 진달래, 나팔꽃, 개망초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잘 알려진 그리스신화 이야기도 이 꽃에 신비감을 더했다. 그의 아름다움에 반한 모든 이의 구애를 차갑게 거절했던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고 갈망한 나머지 결국 죽음에 이르고 그 자리에 핀 꽃이 수선화라니, 얼마나 특별하고 귀한 모습일까 싶었다. 그런데 수선화는 ‘자기애’의 상징이 될 만큼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겸손하다. 민들레처럼 낮게 피고, 개나리처럼 어디나 있다. 그리고 거의 잡초 수준으로 생명력이 강하다. 수선화는 화병에 어울리는 꽃이 아니다. 구근 속에 담아둔 생명을 터뜨리면서 땅에서 솟아오르는 꽃이다.
‘마리 퀴리’도 이런 이미지 때문에, 수선화를 단체의 로고로 삼았나 보다.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수선화는 겨울이 끝날 때 피기 시작합니다. 봄의 상징이고, 새로운 시작과 재탄생을 상징합니다. 밝고 경쾌한 노란색 꽃은 살아 있음을 확인시켜줍니다. 수선화는 매해 어김없이 피는 강인하고, 생명력이 강한 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추모하며 수선화를 심습니다.
(www.mariecurie.org.uk)
우리에게 ‘퀴리 부인’으로 알려진 마리 퀴리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 자선단체는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을 돌보고 지원하는 일을 한다. 공공의료(NHS)에 호스피스 사업이 있지만, 옆에서 부족한 부분을 돕는다. 암 환자, 치매 노인, 그 외 불치의 질병을 앓는 환자들이 생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맞이하도록, ‘마리 퀴리 간호사’라고 불리는 이들을 집으로 보내준다. 시부모님은 두 분 다 암으로 투병하셨다. 두 분 다 집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두 분 다 마지막에는, 마리 퀴리 간호사의 도움을 받았다.
남편도 이제 고아가 되었다. 쉰이 넘은 사람에게 ‘고아’라는 말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이 선생도 이제 고아가 되었구려.” 3년 전, 아버지 장례 때 찾아주신 윤 선생님한테서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이 말이 어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나이가 이렇게 들었는데도 ‘하늘 아래 혼자’라는 생각이 몰려올 때가 있었다. 일흔이 넘은 윤 선생님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이었을까? 남편은 아직 실감하지 못할 거다. 고아가 된 지 이제 겨우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한 달쯤 전에 시누이 다비나가 물었다. “아버지는 이제 기력이 너무 없어. 음식은 물론이고 물도 거의 안 드셔. 임종 과정(dying process)이 시작된 걸까? 자꾸 엄마 때가 떠올라. 너희 부모님도 그러셨니?” “미안해… 모르겠어.” 사실이다. 모른다. 내게 임종은 ‘순간’이지 ‘과정’이 아니었다. 엄마의 경우 응급실의 밝은 형광등과 의료진의 부산한 움직임 때문에 과정을 살피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산란했고, 아버지의 경우 응급실-중환자실-집중치료실로 바뀌는 병원 안의 공간 이동이, 굳이 따지자면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집 거실에서 돌아가셨다. 마지막 몇 달 동안은 창가에 환자용 침대를 두었다. NHS 간호사가 자주 방문했다. 마지막 날에는 마리 퀴리 간호사가 같이 밤을 새어주었다. 새벽에 깜빡 잠이 든 식구를 깨운 것도 그이였다. 우린 그때 한국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은 서둘러 비행기를 탔지만, 런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임종 소식을 들었다. 가족은 아들이 집에 올 때까지 어머니를 옮기지 않았다. 저녁에, 온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고인의 몸이 집을 떠났다.
내가 우리 엄마를 구급대에 실려 보내고 그리 섧게 울었던 것은, 당신 집을 그렇게 황황히 떠나는 모습에 목이 메어서였다. 119 구급대는 쏜살같이 도착했다. 1월의 찬바람을 몰고 쌩하니 들어온 구급대원들은 순식간에 엄마를 이동용 간이침대로 수평 이동했다. 어리둥절한 엄마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아파트만 아니었어도,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지만 않았어도, 침대를 직각으로 곧추 세우지만 않았어도… 달랐을 거다.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전도유망한 변호사였던 다비나는 자신의 엄마가 병석에 눕자 간병을 자처하고 일을 그만두었다. 장례를 치르고 곧이어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자 이번에는 아버지를 돌봤다. 그렇게 8년을 보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후로 아버지의 상태가 나빠지자, 다시 마리 퀴리 간호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간호사는 저녁에 와서 환자를 씻기고 편안하게 자리를 봐주고, 상태를 체크해주었다. 그들은 ‘임종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을 못 넘기실 것 같다.’고 한 날, 아버지는 거실 한복판에 놓은 침상에서 주무시듯 숨을 거두셨다.
불효막심한 일이지만,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대도 절대 다비나처럼은 못한다. 그건 정말 영혼과 몸을 ‘갈아 넣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엄마 아버지도 그걸 원하지는 않으셨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우리 딸들이 나를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길 원하지도 않는다. 내 친구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너희를 돌보았듯이, 나중에는 너희가 엄마를 돌봐야 한다.”고 어릴 적부터 가르친다고 했는데, 나는 아이들에게 ‘나를 돌보라’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거다. 내가 부모님께 해드리지 못한 것을 내 자식에게 바라서는 안 된다.
그래도, 죽음을 어디에서 맞을지 선택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사회가 도와준다면, 삶의 마지막 날 나도 집에 있고 싶다. 바라건대 우리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모습 중간 어디쯤의 방식이면 좋겠다. 국가가 사회가 공동체가 가족이 조금씩 짐을 나눠서 지고 돌봐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마리 퀴리’ 수선화 배지를 가슴에 달았다. 배지는 감사와 지지, 연대의 표시이다. 언젠가 나도 이들을 만날 수 있기를, 그때까지 이 삶을 온전히 누리기를, 바랐다.
수선화가 어디에나 피어 있는 봄날이다.
* 덧붙이는 말
영국의 전체 사망자 가운데 집에서 임종을 맞는 이는 23.5%(2016년)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14.3%(2018년)이다. (암 환자의 경우는 6.2%이다.) 국립암센터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0.2%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생의 마지막 날을 보내길 원한다.
글/ 이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