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이슈에서 여성 이슈 특집을 하면서 멋진 여성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지난해에도 216호에 ‘82년생 김지영’ 특집을, 223호에는 ‘여성의 날’ 특집으로 투쟁하는 여성들을 만났었습니다. 1년 사이 어떤 것들이 바뀌고 더 나아졌는지를 떠올려보면 좋은 뉴스보다는 절망하게 되는 뉴스가 많은 것 같습니다. 빅이슈가 만났던 사람 중 여성 아나운서 채용 성차별 문제로 인권위에 진정을 냈던 대전 MBC 유지은 아나운서가 지난 연말 정규직으로 채용되고 대전 지역에서 민주언론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그나마 제가 들었던 좋은 뉴스인 것 같습니다.
당시 만났던 여성 ‘스피커’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나’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나의 차별, 나의 야망 때문에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 다음에 올 사람들이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 사회에서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고 했죠. 특히 유지은 아나운서는 우리가 만났을 당시에는 아나운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는데도, 10년 전의 유지은을 만나면 똑같이 그 일을 선택하라고 말해줄 거라 했던 게 기억나요. 자신은 좋아하는 일을 합리적인 상황에서 계속하고 싶은 거라고요.
얼마 전에 읽은 소설집 <두 번째 엔딩>의 ‘상자 속의 남자’(손원평)라는 소설에는 트럭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다 반신불수가 된 형을 가진 주인공이 나옵니다. 한때 형은 의인으로 칭송받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병원에 누워 젊음도 미래도 빼앗긴 형의 몸에는 욕창과 수술 자국만 남았고, 그는 겨우 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형이 구해준 아이의 부모는 시간이 흐르자 “언제까지 고마워해야 하냐.”며 이제 다 잊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형의 사고를 교훈 삼아 동생은 주변에 어떤 일이 생겨도 관여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만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남을 돕느라 자신을 희생하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라고 다들 생각하니까요. 어느 날 동생은 누워 있는 형에게 묻습니다. “그때로 돌아가면 같은 선택을 할 거야?” 형이 답합니다.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못해. 답을 하는 순간 누군가는 상처받을 테니까.” 형을 바보 같다 여기던 동생은 우연히 형처럼 어떤 사람을 구하게 됩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누군가를 구하면서 동생에게는 이 생각만이 간절합니다. 나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살았으면 좋겠다.
유지은 아나운서가 해줬던 이야기와 최근 읽은 소설 속 주인공의 혼잣말이 이상하게 연결되어 떠오릅니다. 그래도 살았으면 좋겠다… 누군가 희생하거나 삶을 놓지 않아도 되는 합리적인 세상에서, 그래도 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요. 꼭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고, 더 좋은 날들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손을 잡고 우리 같이 살자고. 앞으로도 그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빅이슈에서는 계속 하고 싶습니다.
글/ 김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