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가 울리는 방에서 서로를 꺼내주는 존재
큰딸 애린이의 친구 벤이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원래 3주 동안 있기로 했는데, 결국 50일을 묵었다. 애린이가, 자기 생일에 벤이 같이 있기를 바라는데 그래도 되냐고 물었다. 자기도 그러면 좋겠다고 했다. 이 예의 바르고 착한 청년이 우리와 같이 지내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난 금요일이 생일이었다. 벤은 비건 초콜릿케이크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고향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두고 간 옷
이부자리를 빨려고 이불을 걷으니, 빨간 후드티가 보였다. 입고 왔던 옷이다. 오래된 옷이다. 공항에 마중 나갔을 때 소매와 허리춤이 짧은 것이 눈에 들어왔었다. 짐을 챙기다가 빠뜨린 모양이다.
첫날 물었다. “여기 있는 동안 뭘 하고 싶니?” “옷을 좀 사고 싶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옷은 작거나 구멍이 났어요.” 둘은 며칠 동안 쇼핑을 했다. 애린이가 골라준 옷은 할랑하고 멋스러웠다. 벤은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새로 산 옷을 입으니, 파란색도 베이지도 검정색도 다 잘 어울렸다. 훤칠했다. 옷이 날개다.
두 사람은 3년 전에, 그러니까 둘 다 열여섯 살이었을 때, 한 미술대학에서 진행한 캠프에서 만났다. 벤은 그때, 장애를 가진 청소년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그곳에 왔다. 같이 있는 게 편안했나 보다. 둘은 그 후에도 계속 연락했고, 이듬해 여름방학에는 캠프에서 만난 이탈리아 친구 집으로 같이 여행도 다녀왔다.
자폐증과 뇌전증이 있는 벤은 조심해야 할 것이 많다. 그는 너무 많은 자극에 한꺼번에 노출되면 괴롭고 아프다. 기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도한 소음, 붐비는 거리, 인파, 번쩍거리는 불빛, 심한 냄새는 피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도 길에서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경찰이 와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자꾸 벤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게 된다. 벤이 내 아들이었다면, 나는 혼자 여행을 보낼 수 있었을까?
“길에서 쓰러지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쓰러질 때 머리가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는 것 정도? 일단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게 주위를 잘 살피고 저의 컨디션을 빨리 알아채는 게 중요하죠. 약을 잘 먹는 것도 중요하고요. 약은 세 가지를 먹어요. 하나는 혈압을 조절하는 약인데, 이게 조절되지 않으면 실명할 수도 있대요.”
“누구 도와주는 사람은 있니?”
“아니오, 제가 해요. 늘 제가 해왔어요.”
하인즈 캔 토마토스프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주로 아시안 비건 음식을 먹을 텐데, 그건 괜찮을까?” “네, 그렇게 예상하고 왔어요.” 우리 집은 기본적으로 잘 먹는다. 일단 식탁에 올려놓는 음식이 많다. (한식상차림이 대개 그렇듯이 기본 반찬 두세 개만 올려놓는데도 여기 기준으로는 벌써 진수성찬이다.) 벤은 아시아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고, 이렇게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먹는 것도 처음 봤다고 했다. 낯선 음식이었을 텐데 맛있게 먹었다. 우리식 쌀밥을 좋아했다.
그래도 계속 낯선 음식을 먹다 보면 익숙한 음식이 그리운 법이다. 그에게도 ‘위안을 주는 음식(comfort food)’가 있을 터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냐고 물으니, ‘하인즈 캔 토마토 크림스프’라고 했다. 당장 슈퍼마켓에 갔다. 하나에 1파운드(1,500원)짜리 깡통이었다. 귀한 청년에게 이것만 줘도 될까 싶었다. 전화로 재차 확인했다. 맞단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배가 아파요. 그때는 아무것도 안 먹는 게 제일 좋고, 음식을 먹는다면, 그냥 이 캔 스프를 먹어요. 다른 것을 먹으면 탈이 나요.” 이걸 사면서 여기에다가 각종 야채를 넣어서 영양가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안 그러길 다행이다. 잘못했으면,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녀의 빵>에 나오는 빵집 주인처럼 내 딴에 상대를 위한다고 지레 짐작하고 쓸데없는 일을 해서 그를 곤란하게 할 뻔했다.
토끼 인형
애린이에게는 ‘미스터 피클’이라는 토끼가 있다. 돌이 되기도 전부터 가지고 있던 봉제 인형이다. 유달리 약한 천으로 만든 건지 아니면 그만큼 오랫동안 부비고 문지른 건지, 10년쯤 되니 헤져서 성근 올이 다 비쳤다. 그래서 내가 검은색 양복을 만들어 입혀줬는데 이제 그 옷도 남루하다. 아이는 9월에 대학에 가는데, 그러면 피클씨는 어떻게 될까? <토이 스토리 3>의 앤디처럼 인형을 버리고 가면, 내가 잘 챙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벤도 토끼 인형이 있다. 같이 왔다. “얘는 이름이 뭐니?” “그냥 레드 레빗이에요. 여행할 때 늘 데리고 가요.” 두 살 때쯤부터 가지고 있었단다. “대학 갈 때도 가지고 갈 거니?” “그럼요. 같이 자야 해요.” 애린이도 거들었다. “나도 대학 기숙사에 미스터 피클을 데리고 가려고.” 괜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 혼자 나가 살 아이 곁에 피클씨가 있으면 힘들 때 위안이 되겠다. 빨간 토끼가 벤에게 편안함을 주듯이.
산책
생일날 저녁을 먹고, 둘은 산책을 나가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세븐 시스터즈’는 들판을 걷다가 강을 지나 결국 바다에 이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미 여덟 시가 넘었다. 너무 어두워질까 봐 걱정이 되어, 운전수를 자처하고 따라 나섰다. 사람 없는 들판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높이 달이 떠 있었다.
애린이는 벤의 시공간을 잘 이해한다. 그가 편안한 시간이 언제인지, 어떤 공간에서 자유로운지, 언제 아픈지, 아플 때는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그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 그가 살면서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그 일로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이야기하면서 보낸 시간이 많았겠다.
메아리치는 방을 넘어
떠나는 날이라 아침을 잘 챙겨 먹이고 싶었는데, 차 한 잔만 마시겠다고 했다.
“여행 전에 뭘 먹으면 꼭 배탈이 나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제일 좋아요.”
“너는 네 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네, 안 그러면 견디기 어렵거든요. 고마운 것은, 지난 3년 동안 제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아요.”
“혹시 애린이가 도움이 되었니?”
“그럼요. 애린이에게 제 상태에 대해 설명하면서, 제 스스로 명료해진 것들이 많아요.”
“애린이를 만나기 전에도 이런 얘기를 같이 한 친구들이 있었니?”
“제 친구들은 다 자폐증이 있어요. 비슷한 경험을 말하면서 공감하는 것은 좋은데, 그건 마치 사방이 막혀서 메아리가 울리는 방(echo chamber)에서 얘기하는 것과 비슷해요. 그냥 우리끼리 얘기죠. 그런데 우리와 다른 사람이 잘 들어주니까, 말하면서 오히려 제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죠. 애린이와 저는 서로를 교육시켜요. 저는 애린이에게 에이블리즘(ablism, 장애가 없는 이의 능력을 기준으로 장애인을 평가하고 차별하는 행위와 사고)에 대해 알려주었어요. ‘정상인’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위험한지에 대해서요. 애린이는 저에게 인종주의(racism,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믿고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행위나 사고)을 가르쳐줬어요. 백인 남성인 저는 그동안 아시아계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덕분에 알게 되었죠.”
나는 이 젊은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벤은 자기 생일 즈음에 우리 집에 다시 와도 되냐고 물었다. 올해는 생일을 축하받고 싶었나 보다. 물론이다. 한 달 후에 그는 다시 이곳에 온다. 생일 선물도 사두었다. 쿠쿠전기밥솥. 애린이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 어디서 살든 밥 굶지 마라. 그리고 행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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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사진. 이향규
남편과 두 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영국에서 산다. 한국에서는 대학과 연구소에서 일했다. 지금은 집에서 글을 쓴다. <후아유>, <영국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같은 책을 냈다. 작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