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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ug 12. 2021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을 건너뛰고 '어떻게 할까'로 나아가기

아이를 낳은 뒤(정확히 말하면 아이가 돌이 지나 어린이집에 가게 된 후) 제 생활은 전보다 규칙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의지로 통제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 시간표에 맞추게 된 거죠.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의 일과는 대개 이렇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인 아이를 9시까지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다음, 한 시간 동안 요가를 한 뒤 일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부족하니 아침 겸 점심은 항상 샌드위치같이 간단한 걸 먹죠. 오후 4시가 되면 어린이집 하원을 시킵니다. 아이와 놀다가 7시가 되면 느긋한 저녁을 함께 먹고 8시쯤 목욕을 시켜요. 남편은 퇴근하고 보통 8시쯤 집에 와 저와 바통 터치를 하는데요. 그는 밤 10시 전에 아이를 재운 뒤 설거지를 합니다. 그 외 집안일은 몰아두었다가 최대한 주말에 같이 하고요. 저는 남편이 온 이후부터 쉬거나 책을 읽다가 씻고 12시 전에 잠듭니다.

오늘은 일이 잘 되니까 조금만 더 해야지, 오늘은 남은 체력이 없으니까 아이 저녁은 굶겨야지, 오늘은 밤새서 책을 읽고 내일 늦잠을 자야지, 같이 일탈을 시도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4시까지는 어린이집에 도착해 있어야 하고, 아이는 때 맞춰 밥을 꼬박꼬박 먹어야 하며 시계가 내장되어 있는지 7시 전에 눈뜨는 아이는 엄마를 손가락으로 찌르고 엉덩이로 눌러가며 깨웁니다. 기상과 동시에 시작된 육아에는 건너뛸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그냥 생각하지 않고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처럼 생각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거의 매일 하는 반복을 우리는 루틴(routine)이라 부르죠.

이런 생활을 1년 넘게 하기 시작하자 만성적이었던 불안과 감정기복이 줄고 불면증이 사라진 걸 발견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전보다 줄었는데 생산량에는 딱히 변화가 없고, 자율성이 줄어들었음에도 왜 스트레스를 오히려 덜 받게 되었는지 의아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걸 알았어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여덟 시간이라고 치면 우리는 세 시간 정도는 일하기 싫다, 어떻게 안 할 수 없나 같은 생각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기 쉽습니다.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이걸 하지 않았을 때의 상황까지 상상하게 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자신의 의지를 탓하게 하죠.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시간보다 헬스장에 가기 싫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더 길었던 적 다들 있지 않으셨나요?

아이의 시간표에 맞추게 된 지금은 ‘그냥’ 합니다. ‘하기 싫은데 어떻게 안 할 수 없나.’ 같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고 안 할 수 있는 가망도 없으니까요. 그러자 행동을 고민하는데 쓰던 시간이 줄어서 감정과 사고의 에너지가 절전되었습니다.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시간을 건너뛰니까
곧바로 ‘어떻게 할까’로 전환되는 거죠.

우리 일상은 변동 가능이 큰 것과 변동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변동 가능성이 큰 일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므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심각해진 코로나19로 인해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되어 정해져 있던 강의가 취소되는 것은 제가 어찌할 수 없죠. 이런 일들에만 대처하기에도 우리 에너지는 빠듯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요. 이처럼 변동 가능성이 큰 일들 위주로 고민하기 위해서 그 외의 덜 중요한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해치우는 영역으로 넘기는 겁니다.

한편 불안은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생각만 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립니다. 시험공부에 집중해 있는 순간에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시험공부를 미루고 있을 때, 어떻게든 안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불안감은 찾아오지요. 회사에 다닐 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자주 찾아왔고, 운 좋게 전업 작가로 프리랜서가 되면서는 전보다는 불안이 줄긴 했지만 앞으로도 독자들이 나를 찾아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우울해질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몸이 바쁘니 그렇게 고독하게 생각에 몰두하는 시간 자체가 없고, 잠깐 시간이 났을 때 재빨리 책을 읽거나 강의 준비를 하거나 글을 써야 합니다. 항상 뭔가를 하고는 있으니 약간의 긍정이 섞인 체념을 하게 되더라고요. ‘오늘도 일단 조금이라도 했다. 결과는 운에 맡기지 뭐.’라는 식으로 말이죠. 

육아서를 보면 아이는 생활 속에서 변화가 잦으면 불안해하기 쉽다고 합니다. 심리적인 안정을 주기 위해서 예측 가능한 생활 습관을 만들라고 하지요. 주 양육자는 이를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을 정해 알려주고 일관적으로 반응해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삶 속에서 안정을 찾고 스스로의 질서를 만들어나간다고요. 아이가 그렇다면 어른도 크게 다를까요? 

실제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의사들이 꼭 지키라고 추천하는 일상의 루틴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며 식사를 꼭 챙기고 밖에 나가 햇빛을 쬐는 거죠. 기분이 나쁘다고 굶지 말고, 우울하다고 밤새지 말고, 슬프다고 집에만 있지 않는 거예요. 생각하지 않고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루틴을 만들면 마음도 뒤따라 걸어올 때가 있어요. 언제나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움직이면 마음이 따라붙는 경우가 많답니다. 그러니 마음과 몸의 건강, 균형을 위해서 일상의 규칙을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하는 일을 늘린다면 정말 중요한 일에 생각을 쏟을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가 늘어날 거예요.

그림. 조예람


혹시 너무 뻔한 이야기 아니냐고 생각하셨나요?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의 저자 로버트 풀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지혜는 대학원의 상아탑 꼭대기가 아니라 바로 유치원의 모래성 속에 있다.”고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을 계속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반복해서 익혀갈 뿐이라고요. 그러니 삶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 어린 시절 배운 규범 앞으로 문제를 마주하라고 제안합니다. 딩크족이었던 제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한 뒤 가장 괴로웠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지 못한 내가 어떻게 가능할까?’ 임신하고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가서 육아책을 읽었습니다. 아이에게 어떻게 대해줘야 하는지 익혔죠. 책을 읽어가며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 대하는 모습은 어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상당 부분 적용이 가능한 일이구나. ‘아이였던 너에게’는 이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된 이야기를 썼습니다. 제가 그랬듯, 당신도 과거와 멀어진 곳에서 자주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민이 생기면 스스로를 아이 바라보듯 해보기도 하면서요.      

* 그동안 ‘정문정의 아이였던 너에게’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주제로 다시 돌아올게요.


글. 정문정

<더 좋은 곳으로 가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썼습니다.

인스타그램 @okdom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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