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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Aug 18. 2021

아직은 다정함을 말할 때_
식물과 수영의 즐거움

차갑고 뜨거운 매혹 속으로

요즘 나의 관심사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두 가지는 말할 수 있겠다. 하나는 지난 연재 때 밝혔듯 반려 식물과 함께하기다. 식물을 들인 게 지난해 8월이었으니 어느덧 1년이 다 됐다. 그사이 탄력이 붙어 다섯 가지 식물을 맞이했다. 선인장, 몬스테라에 이어 올해 여름 초입에는 독특한 향이 나 모기를 쫓는다는 구몬초를 들였고 (모기를 쫓아주는 것 같지는 않지만, 괜찮다.) 한여름을 나면서는 올리브와 로즈마리를 들였다. ‘샀다’는 말 대신 ‘맞이하고’, ‘들였다’는 단어를 고르게 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다. 반려 식물이 맞다. 아침에 눈 뜨면 식물 앞으로 쪼르륵 달려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손으로 쓰다듬어보고 향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이제는 거의 루틴이 됐다. 심지어 로즈마리는 잎을 따서 차로 우려내 마시기까지 하니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

“식물이 잘 자라는 집인 거 같은데요, 그보다도 잘 키우시는 거예요.”

다섯 식물을 데리고 오며 자연스레 동네 단골이 된 화원의 주인장이 ‘잘하고 있다’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식물을 죽이는 데 선수였던 내가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거 정말 신나는 일이다. 어제는 자려고 누웠는데 줄줄이 서 있는 식물들을 보며 갑자기 별생각이 다 드는 거다. ‘나 장기 출장 가면 너희 어쩔 거니? 코로나 상황 좋아져서 해외여행 갈 수 있게 되면 누가 너희에게 물을 주니?’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이 집을 비울 때마다 친구들에게 ‘아이들’을 부탁한다고 하던데 나도 그럴 것 같다.

    

수영인’ 다 됐습니다

또 하나의 관심사라면 수영이다. 2년 전 여름, 그땐 정말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주말, 평일 가릴 것 없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만 하던, 노동의 쳇바퀴에 올라타 옴짝달싹 못 하던 때였다. 일하러 지방으로 이동하는 KTX에서도 간이 책상에 의지해 인터뷰 녹취를 풀고 글을 썼고 목적지에 도착해 강의하고는 상경 기차에서 또 글을 썼다. 어깨가 안쪽으로 말려들었고 목은 점점 굳어갔다. 영화에 관해 말하고, 쓰고, 수업하고, 영화제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프리랜서의 삶이란 실상 이처럼 조각난 노동을 하며 제 몸을 갉아 넣는 게 아닐까. (아닐 거다. 내가 잘하지 못하고 있는 걸 거야.) 전국의 수많은 영화제와 영화 관련 수업과 행사를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 다 하고 싶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힘을 적절히 안배하고, 거절을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고 아는 데서 끝내는 게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한 번의 거절이 혹여 다음이라는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게 프리랜서가 아닌가. 그러니 매번, 일단, ‘해보겠다’가 입 밖으로 먼저 나온다. 그렇게 계속 ‘해보겠다’고 하다가 정말 온몸이 엉망이 됐던 그해 여름이었다. 천운처럼, 기적처럼 수영이 내게 왔다. 수영을 ‘영접’한 거다.

그때도 무주산골영화제로 일하러 가는 길이었다. 동행한 영화감독 A와 사는 얘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건강 얘기가 나왔다. A는 오랫동안 수영을 해왔다며 한번 꼭 해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재밌을까?’ 반신반의. 영화제에 도착해 오랜만에 만난 배우 B와 근황을 전하다 B가 한창 수영에 빠져 있다고 했다. 새벽 수영을 하고 나와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릴 때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며 극찬이다. ‘좋을까?’ 반신반의. 영화제에서 만난 C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내 얼굴빛을 보더니, 도사님처럼 말했다. “안 돼, 안 돼. 빨리 뭐라도 해!” ‘정말?’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 뭐라도 해야 했다.

서울로 돌아와 그 길로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무슨 용기였을까. 모르겠다. ‘수영, 그게 뭐라고!’와 ‘수영, 그거 뭐긴 한가 보네!’ 사이에서 생각 말고 일단 해보기로 했다. 사실 수영이라고 하면 진입 장벽이 높은 운동이었다. 못 하니까 배워야 하고 배우자니, 수영장에 가야 하는데 어릴 때 가본 수영장의 기억이 좋지 않았다.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지독스러웠고 (지금의 수영장은 그런 냄새 없이 깔끔하다.) 강사 선생님의 무시무시한 고함이 무섭게 울려 퍼지는 무서운 곳이었다. (적어도 내가 본 강사 선생님들은 교육을 이유로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수영장은 아예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비할 게 너무 많지 않은가. 귀찮고 민망하다.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고? 그냥 반바지 입으면 안 될까? 수영복 사러 가야 한다고? 안 입어보고 살 수는 없는 거니? 제모도 해야 하겠지? 대공사가 되겠는걸?’ 어쩌면 수영보다 수영장에 가야 한다는 게 더 큰 일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귀차니즘’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수영을 해보겠다고 달려갔다. ‘수영, 그게 뭐라고. 아니, 내 몸으로 내가 운동한다는 데 뭐가 부끄러워! 해보고 아님 말고!’ (나의 허튼짓과 사달은 이런 마음 상태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시작해 이제 2년 차다. 수영장을 가지 않으면 마음부터 심란하다. “이제 수영인이 다 됐다.” 얼마 전 만난 A가 인정했다. 신나고 기분 좋은 말이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운동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나는 수영이 꽤 잘 맞는다. 물속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 없다. 고요하고 시원하고 자유롭다 느낀다. 부력에 몸을 맡기고 중력을 벗어나는 듯한 그 감각의 시간을 어떻게든 연장하고 싶다. 물에 더 오래, 물속 더 깊이, 물의 흐름을 따라 더 멀리 가보고 싶다. 물속에서라면 물 밖 세상과 잠시 안녕할 수도 있지 않은가. 동네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때, 러닝머신을 뛰거나 등산을 할 때 주머니 속에 있거나 손에 들려 있는 휴대폰. 그게 물속에서는 불가능이다. 특히 세상만사 귀찮아질 때, 누구도 보고 싶지 않을 때 수영장으로 가면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고 허락받는 듯이. 

그리고 사실, 울기도 좋다. 물안경을 끼고 수영하면서 물속에서 몇 번 울컥울컥했던 것 같다.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뒤범벅. 물안경에 낀 서리 덕분에 잠시 세상이 흐릿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또 이렇게 마음이 요동치면 수영 자세도 흐트러진다. 헤엄칠 때 손발의 움직임과 호흡 타이밍에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금세 방향이 흐트러지고 킥과 스트로크가 어긋나고 호흡이 가빠진다. 무념무상이 필요하고, 무념무상이 돼야 한다. ‘불멍’만큼 ‘물멍’ 해야 한다. 물속이든, 물 밖이든. 잡생각을 비우고 멍하니 물을 느끼고 볼 필요가 있다.     


물에 매혹된 예술물의 물성을 탐하는 영화

무엇보다 물의 물성이 매혹적이다. 물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톡톡 건드려 볼 때의 표면 장력, 팔과 다리로 물을 가를 때 물과 나 사이의 부피감, 공간감 혹은 저항감 같은 건 지상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유의 감각이다.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거나 그 흐름을 이용하며 부유하고 유동하는 것도 좋다. 물의 파동으로 유속이 달라질 때 그 속도감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며 나만의 속도를 만들어간다. 물론 수영 실력이 중요하겠지만, 수영할 때 나만 잘한다고 속도가 난다거나 부드럽게 유영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같은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 그들이 만드는 물의 파고와 파동이 내 움직임에 크고 작게 영향을 미친다. 분명 그러하다.

물의 이미지 혹은 물의 물성에 관해서라면 예술이 꿈꿔온 오랜 꿈의 영역이기도 하다. ‘수영장의 화가’ 호크니의 그림들, <나폴리 4부작>과 <성가신 사랑> 등 엘레네 페란테의 소설 속 죽음과 욕망이 넘실대는 바다, “물속에서 천천히 호흡하라.”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래픽 노블 <염소의 맛>이 즉각적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영화들.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1973)의 물과 죽음의 도시 베니스, 린 램지의 <쥐잡이>(1999)와 <스위머>(2012)의 죽음 충동이 깃든 물속, 안드레아 아놀드의 <피쉬 탱크>(2009)에서 인물을 딜레마와 시험에 빠뜨리는 무시무시한 강가, <보물섬>(2018), <전원, 승차!>(2020) 등을 통해 물이 있는 휴양지에서 겁 없는 아이들이 벌이는 돌파를 그리는 기욤 브락,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 <클레어의 카메라>(2016), <도망친 여자>(2019), <인트로덕션>(2020)까지 최근 다시 바다로 가 그곳의 잔물결과 예측할 수 없는 물의 흐름, 파고의 아름다움을 주목하는 홍상수. 더 많은 영화가 있을 것이다.

엘리자 페트코바의 <어 피쉬 스위밍 업사이드 다운>(2020) 스틸

게다가 유독 근래 여성 감독들의 영화에서 물의 이미지가 강하게 환기되는 것 같은 건 우연일까. 지난해 본 여성 감독의 영화들만 해도 그러했다. 일본의 오다 가오리의 다큐멘터리 <세노테>(2019)는 멕시코 유타칸 북부에 있는 거대한 물웅덩이로 들어가 오래된 기억과 죽음의 흔적을 환기한다. 멀리 파나마에서 날아온 아나 엘레나 테헤라의 <판키아코>(2020)는 바다 이미지와 노스탤지어의 감각을 잇고, 경계 없는 물의 물성과 그 이미지로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든다. 식민지 파마나의 역사를 물의 이미지로 써 내려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개봉한 주순의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2019) 속 수영장은 주인공 소녀의 마음의 풍경이기도 하고, 엘리자 페트코바의 <어 피쉬 스위밍 업사이드 다운>(2020)의 주 무대인 집과 야외 수영장은 인물들의 비밀스러운 관계의 거점이 돼준다. 물의 성질과 감각, 물이 있는 공간과 장소를 경유하거나 그것의 특징을 비틀어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거나 자신의 영화적 언어를 제시하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읽힌다. 그녀들의 영화 속 물은 고요한 듯 보이나 실은 엄청난 에너지가 꿈틀대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고 역사의 증거가 된다. 특히 에로스와 타나토스, 삶과 죽음. 욕망과 좌절이 뒤엉켜 있다. 이런 게 매혹이 아니고 무엇일까.

   

풍덩수영하며 늙자

다시, 내 작은 수영장으로 돌아왔다. 실은 수영장에서 수영한다는 것 역시 그러하다. 고요해지길 욕망하면서도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싶고, 수영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으면서도 그 모두의 시선을 온전히 감당하고 받아내고 싶다. 그 복잡한 감정이 마구 뒤엉키려 할 때면 나는 다시 물속으로 풍덩, 잠영해 들어가 얼굴을 파묻는다. 아무튼, 수영이다. 지금으로서 나는 하릴없이 레일을 오가며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 수영장의 할머니들처럼 그렇게 오래오래 수영하며 늙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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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지혜

영화평론가,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으로 일했고 현재는 영화 웹진 ‘REVERSE’, ‘퍼플레이’ 웹진 ‘퍼줌’ 등에 글을 쓴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쓸 일이 많지만, 이 지면에서만큼은 논-픽션의 세계를 무람없이 오가고 싶다.


위 글은 빅이슈 25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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