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빈티지 연필깎이로 깎아 내려가는 것의 매력
20대 후반,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고 싶었다. 첫 직장에 다니면서 이렇게 일할 거면 차라리 나만을 위해 일하자는 다소 짧은 생각으로, 괜찮은 사업 아이템을 찾겠다며 신촌부터 상수, 홍대, 합정을 거쳐 연남동을 돌아다녔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곳은 연남동의 연필 가게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을 걸어 올라가 입구를 열면 코끝을 간질이는 나무 냄새가 나는 곳이었다. 본 적 없는 연필과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진열대까지 나는 순식간에 이 세계에 매료되었다. 연필의 세계는 넓고 놀라웠다. 나는 연필을 좋아했고, 연필보다 주변 도구는 더 좋아했으며, 지우개, 연필깎이, 메모지 등 익숙한 도구의 낯선 모양을 좋아했으므로. 그중에서 내 시선을 훔친 건 다름 아닌 연필깎이였다. 이 넓고 놀라운 연필의 세계에서 연필깎이라니?
넓고 놀라운 연필의 세계가 실현되기 위해선 비단 그것을 다듬어내는 연필깎이가 필요한 법.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빈티지 연필깎이는 내 마음을 훔치다 못해 사업 아이템을 찾겠다며 찾아 들어온 나의 다짐과 결심마저 잊게 했다. 그러니까 나는 사업 아이템은 뒤로하고 순식간에 평범한 소비자가 되고 만 것이다.
말발굽처럼 생긴 연필깎이였는데 둥근 말발굽 맞은편에 칼날이 부착된 아주 독특한 모양의 도구였다. 말발굽 쪽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연필의 몸통에서 흑심이 돌출되는 지점을 향하여 쓸어내리면 연필이 뾰족하고 날카로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익숙한 도구의 낯선 모양과 낯선 사용법, 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손이 칼날에 닿을 일이 없으니 안전하기까지! 이 물건을 만나고 나는 결심했다. 까짓것 이 연필깎이의 사용법을 반드시 익히고 말겠다고.
내가 이토록 낯선 물건의 사용법에 이리도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건 비밀인데 나는 사실 연필을 잘 깎는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기차 모양의 하이샤파 연필깎이를 돌려가며 연필을 깎고 있을 때, 나는 커터칼로 연필을 깎았다(이건 소묘를 그리던 이모의 영향이었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 생략하겠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내 손으로 연필을 깎아왔고, 가끔 내 짝꿍의 연필을 깎아주기도 했고, 고등학교 야자 시간엔 공부하기가 싫어 연필 깎는 척으로 야자 시간을 대부분 보냈으며, 다 큰 어른이 된 지금도 사무실에서 딴생각을 하기 위해 가끔 연필을 깎는다. 그러니 잘 깎을 수밖에. 이런 내 모습에 동료들이 놀랄 때도 있다(물론 그것이 실력 때문인지, 연필을 직접 깎고 앉아 있어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십수년간 연필 톱밥 좀 들이켜본 경력자였기에 금방 익히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어려울 줄은 이제야 알았지만.
솔직한 사용 후기를 말하자면 어렵고 불편하다. 쉽게 돌려 깎을 수 있는 수동 연필깎이부터 알아서 깎아주는 자동 연필깎이가 세상에 널려 있으니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낯선 모양의 매력에 매료되면 그건 답이 없다. 방법은 밤낮으로 익히면 그만이고, 조금 불편하게 사용하면 된다.
사용법이 조금 어렵고 약간 불편하지만 조금만 다룰 줄 알면 유용하기엔 이 물건만 한 것이 없다. 육각형이나 둥근 모양의 연필은 물론 납작한 연필이나 굵은 색연필, 파스텔을 깎을 때 편리하다. 요즘 말로 편견 없는 연필깎이랄까.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뾰족한 흑심을 만들어낼 때 은근한 자기 효능감조차 느껴진다(지나친 자기애 같지만 사실이다). 동시에 깎을수록 쓸 만해지지만 깎일수록 수명이 단축되는 연필과 쓸모 있게 만들어 주지만 동시에 수명을 단축시키는 연필깎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물론 진지하진 않다. 연필을 깎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으니까(언젠가 연필을 깎을 때 이 문장이 떠오른다면 생각해보자. 생각한다 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단상을 공유하자면 하루는 깎여나가는 연필처럼, 하루는 깎아가는 연필깎이처럼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겠거니 생각해보기는 했다.
아, 사업 아이템을 찾겠노라 싸돌아다니던 20대 중반의 회사원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할 테지. 나는 20대 중반의 회사원을 가뿐히 넘어 어엿한 30대 회사원이 되었다. 수시로 연필과 연필깎이 사이를 오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그런 회사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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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유진
글쓰기로 먹고사는 평범한 직장인. 햇빛과 그늘과 바람만으로 만족하는 소박한 어른을 꿈꾸지만, 소유욕이 많아 큰 집으로 이사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