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식을 버리지 못한다. 내 그릇을 말끔히 비우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의 접시에 남아있는 음식까지 마치 내가 끝내줘야 하는 숙제처럼 보인다. 엄마의 영향이다. 엄마는 음식을 절대로 남기거나 버리지 않았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음식점에서도 그랬다. 심지어 반찬이 스무 개쯤 나오는 한정식 집에 가도 그 많은 접시를 다 비우는 것이 미션이라도 되는 것처럼, 깨끗이 드시고 하얗게 된 접시를 한 옆에 가지런히 포개놓으셨다. 엄마의 집착이 과하다고 뭐라 했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그러고 있다.
우리 집은 절간마냥 음식물 쓰레기가 (거의) 없다. 내 몫은 물론 아이들이 남긴 음식도 내가 깨끗이 ‘처리’한다. 문제는 남편이다. 완전채식을 하는 우리와 달리 그는 혼자 스테이크를 먹고 생선튀김을 먹는다. 그리고 남긴다. 나는 번번이 갈등한다. 이걸 버려야 할지, 내가 먹어야 할지. 이미 살생한 이 고기를 어찌해야 할지.
중학교 때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일주일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조계종 재단이었던 우리 학교에서는 중3 여름방학이 되면 이름난 고찰에서 수련회를 했다. 내가 음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때 받은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다.
절에서는 세끼 발우공양을 했다. 옻칠을 한 발우 네 개를 앞에 놓고 밥, 국, 반찬, 그리고 청수(물)을 받았다. 말없이 음식을 다 먹은 다음에는 청수를 붓고 그릇을 닦았다. 닦고 난 물은 마시거나 청수통에 버렸다. 버릴 때 부서진 밥풀 하나, 깨 한 톨, 고춧가루 한 개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다. 아귀 때문이란다. 아귀는 생전에 탐욕스러웠거나 생명을 학대한 자들이 환생한 것인데 목구멍이 바늘구멍만 하고 배가 태산만 해서 늘 갈증과 허기로 괴로워한단다. 오직 수행자가 발우를 행군 청수만 먹을 수 있는데 물에 음식 찌꺼기가 조금이라고 남아 있으면 아귀의 목이 타버린단다. 나는 그릇을 헹군 물을 청수통에 붓지 않고 다 마셨다. 눈이 나쁜 내가 놓친 찌꺼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벽 4시 반에 예불로 하루를 시작했다. 해뜨기 전 어스름한 하늘을 가로질러 불당에 들어서면 향을 머금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높은 천장까지 가득했다. 목탁 소리는 투명했다. 경을 외우는 젊은 스님의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아침 예불도 하고 저녁 예불도 했으련만 유독 새벽 예불이 선명한 것은, 그 어둑한 공간과 냄새, 그리고 텅 빈 소리 때문이다.
수련회에서 돌아와 그 스님에게 편지를 썼다. 떠나기 전날 툇마루에 앉아 인사를 나눈 게 인연이었다. 답장이 왔다. 그때부터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쳐 대학원에 입학할 때까지 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도, 그도 말동무가 필요했다. 그는 아팠다. 간질환이라고 했다.
마을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 쇠고기로 몸을 보완하라고 하더라만, 이곳은 쇠고기라면으로 대역할 뿐이란다. 스스로 걸고 짊어진 이 짐을, 어데나 쉽게 벗을 수 있겠느냐.(1982년 12월 11일)
편지 봉투 속에는 중학교 졸업 선물이라며 종각에 새겨진 글귀를 탁본한 한지가 들어 있었다. “졸업과 입학과 끊임없는 정진과 그리하여 살아가는 시간이 유쾌하고 값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보낸다고 했다. 나는 선물이라는 말보다 쇠고기라면이라는 말에 마음이 묶였다.
이따금씩 받은 편지에는 산사의 사계절이나 ‘소리 나는 도시’에 다녀온 이야기, 그곳에서 본 연극 이야기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나도 내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그가 이런 답장을 보낸 것을 보면 나는 그때 너무 애쓰며 살았나 보다.
그 어느 것이라 하든, 그것은 그것대로 싱싱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교한 언어로써 억척스런 머리로써 해결하려는 버릇보다는 내 앞에 전개되는 삶을 온 몸 전체로써 받아들이고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대로, 불쾌한 일은 불쾌한 대로 느끼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 교육은 꽤 사람을 영리하게 만드는 것인데 내가 괜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모르겠다.(1983.8.11.)
늘 하던 얘기다만, 너무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도 좋을 수는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알맞게(中道)하는 것을 잊지 말거라.(1984.1.18.)
내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던 건지, 고3이 되던 해 봄에 그는 나를 이렇게 불렀다. “가슴에 주머니만 가득 달린 분주한 벗이여.”
벗이여, 다시 창문을 열라. 삼월이 아닌가. 가슴에 수북이 달린 열쇠를 모두 끌러 버리고 남으로 남으로부터 날아오르는 제비처럼 우리도 하늘을 날자. 이제 햇볕이 들지 않아도 바람은 이미 녹색의 목도리를 걸치고 남해를 건너 시방 막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다. 청순한 바람이 대청마루를 올라서며 나뭇가지 가지마다 수북한 언어를 내리고 있다. 벗이여 가슴에 주머니만 가득 달린 분주한 벗이여. 님 만나고 다니는 삼월의 바람같이 우리도 날개를 달고 노래를 하자.(1985.3.1.)
대학에 들어간 후에 나는 시위 소식을 전했고, 그는 “혼돈된 정의와 진리를 살리기 위해 외치다가 봄꽃처럼 사라져간 영혼들에게 축복 있기를 서원”했다. 대학원에 입학한 해에 그는 이렇게 썼다. 마지막 편지이다.
그대가 가는 길에 좋은 선지식들이 있기를 기원한다. 그대가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잡담을 시작할 때에도 이승에서 시작된 그대의 육근(六根)이 청정한 빛으로 깨어나기를 원한다.(1990.9.25.)
남편이 남긴 생선튀김을 보다가 시작한 생각이 뜬금없이 멀리도 갔다. 그래 먹자! 인간이 먹겠다고 죽여놓고는,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면, 이 목숨은 얼마나 허망할까 싶다.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먹고, 그 생명에 빚진 만큼 내가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
스님은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포털사이트마다 그의 법명을 넣고 아무리 검색해봐도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래된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그분 덕분에 내가 얼마나 특별한 성장기를 보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첫 번째 ‘선지식’이었던 그가 건강해졌기를, 스스로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지 않았기를, 그도 날개를 달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글, 사진/ 이향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