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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12. 2021

[빅판자서전] 바다와 사람을 사랑해서, 눈이 맑은 사람

광화문역 5번 출구, 곽창갑 빅판을 만나다

“괜찮아요.” 곽창갑 빅판은 인터뷰 내내 이 말을 반복했다. 임대주택 자랑을 해달라고 해도, 함께 사는 분이 어떠냐고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변은 괜찮다는 말뿐. 인터뷰를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 몰라 난감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내게 인터뷰에 동석한 빅이슈 코디네이터가 말했다. “곽창갑 선생님은 어디가 어떻게 좋다고 자세히 말하지는 못하세요. 하지만 좋다는 말을 여러 번 하세요. 임대주택에 들어가서 좋다고 저희를 볼 때마다 말씀하시거든요.” 곽창갑 빅이슈 판매원(이하 ‘빅판’)은 ‘질’보다는 ‘양’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지는 못해도, 같은 말을 하고 또 하며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광화문역 5번 출구에서 오늘도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는 곽창갑 빅판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 인터뷰에는 특별히 빅이슈코리아의 김다정 코디네이터도 동석해서 그의 말을 거들어주었다.      


군산에서 멸치잡이 배 타다가 서울로 온 사연 


김은화(이하 김): 빅판으로 일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곽창갑(이하 곽): 제가 군산에서 배를 타다가 2018년 2월에 서울로 올라왔거든요. 군산에서 배 타고 20분 정도 들어가면 개야도라는 섬이 있어요. 거기서 멸치잡이 배를 탔지요. 멸치를 잡아 오면 그걸 삶아서 냉동해뒀다가 햇빛 날 때 널어요. 멸치만 잡는 게 아니라 주꾸미도 잡고 꽃게도 잡고 그랬어요. 8월이 되면 김발을 해서 김 포장에 들어가고요. 

김: 그럼 1년 내내 바다에서 일하는 거예요? 

곽: 네. 물때 맞춰서 아침에 밥 먹고 나가요. 어망에 붙은 찌꺼기 털고, 점심때랑 저녁때 바다에 나갔다가 들어와요. 하루에 세 번 정도 배를 타요. 물고기를 잡으면 노란 바구니에 담아서 싣고 선창에 다녀오고요. 

김: 개야도에서는 얼마나 사셨어요?

곽: 3년 정도 살았어요. 아는 사람 소개로 서울역에 있는 소개소 거쳐서 군산으로 갔거든요. 일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먹고 자고 했어요. 그때가 2016년인가 그랬는데 한 달에 15만 원 받았어요. 돈을 통장으로 받은 건 아니고 현금으로. 

김: 그만두실 때 혹시 퇴직금을 받으셨나요?

곽: 아니요. 다른 돈은 받은 적 없어요. 2017년 8월에 제가 사장님이랑 술을 끊기로 약속했거든요. 내기에서 제가 이겨서 사장님한테 90만 원을 받았어요. 그때 술을 끊은 이후에 지금까지 안 마셔요. 

광화문역 5번 출구, 곽창갑 빅판

김: 그 전에 술을 많이 드시는 편이었어요? 

곽: 아니, 그 전에는 맥주 마시면 한 번에 서너 병 마셨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 소주는 안 마셨어요. 

김: 멸치잡이 그만둘 때 혹시 못 떠나게 하지는 않았어요?

곽: 아니요. 집에도 갔다 왔어요. 엄마가 광주에 사는데, 사장님이 명절에 집에 다녀오라고 해요. 가족들하고도 자주 연락했어요. 

김: 같이 배를 탔던 분들은 어땠어요?

곽: 우리나라 사람도 있고 외국 사람도 있어요. 여덟 명이 같이 생활했지요. 같이 먹고 자는데 네 명은 배 타고 나가고 집에 있는 네 명은 멸치 삶는 일을 해요. 공장에서 방을 네 개인가 만들었어요. 둘이 쓸 때도 있고, 셋이 쓸 때도 있고. 

김: 일은 할 만하셨어요?

곽: 괜찮았어요. 배 타면서 멀미는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 파도쳐서 꿀렁꿀렁하면 배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바람 불고 위험하면 아예 안 나가요. 쉴 때는 집에서 TV 보고, 밥 해먹고…. 

김: 그 일은 왜 그만두신 거예요?

곽: 김발 하면 약을 치거든요. 물에 염산을 타서 김발을 넣는데, 손발이 따갑고 독해서 못 하겠더라고. 장갑 끼고 장화 신어도 염산이 튀어 살에 닿으면 따가워요. 그래서 제가 사장님한테 말했어요. 그만한다고. 군산에서 또 오라고 연락이 왔는데 안 갔어요. 

김: 아픈 데는 없으셨어요?

곽: 사장님이랑 치과에 같이 갔었어요. 사장님 아는 분이 하는 병원이 있어서 거기서 틀니를 해줬어요. 원래는 50만 원인데 35만 원에 해줬지요. 사장님이 돈도 다 내주고. 좋은 분이에요. 서로 잘 알아요.      


서울역 마당발이 봉사활동을 하기까지 


김: 서울에 와서는 어디서 생활하셨어요?

곽: 쉼터에서 생활했어요. 양평쉼터에 있었거든요. 

코디네이터(이하 코): 서울역에 다시서기종합지원센터라는 노숙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지원하는 센터가 있어요. 거기에서 곽창갑 빅판을 양평쉼터로 안내했나 봐요. 노숙인복지시설이 서울에도 있지만 상황이 있어 양평으로 가신 것 같아요.  

곽: 양평에 사람이 120명 있어요. 건물이 두 군데나 있지요. 방이 커서 한 방에 아홉 명씩 자요. 침대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바닥에 이불 깔고 자요. 몸이 좋으면 노가다 뛰러 나가요. 며칠 쉬었다가 일하러 갔다가 그랬어요. 

김: 막일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곽: 그전에도 해봤으니까 괜찮아요. 서울역 소개소에서 연결해줘서 노가다 나간 적이 있는데, 일당 7만 원을 받으면 소개비로 5천 원을 떼요. 일주일간 다녔는데 맞지 않아서 경기도로 갔어요. 경기도가 임금이 세거든요. 양평에서 노가다 다닐 때 하루에 10만 원씩 받았어요. 서울보다 경기도 임금이 더 세요. 

김: 양평쉼터에서는 왜 나오셨어요? 몇 개월만 있을 수 있나요?

곽: 자기가 있고 싶으면 좀 더 있을 수 있었어요. 심심해서 나왔어요. 

코: 양평쉼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노숙 생활을 하시다가 삼일교회 봉사자 분들을 만나신 것 같아요. 그분들이 서울역에서 매주 화요일에 거리 노숙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 컵밥 등 간단한 식사를 제공하는 자원봉사 활동을 하거든요. 그분들에게 임시 주거지가 될 수 있는 고시원을 지원해주는 사업도 하고 있고요. 

곽: 삼일교회에서 고시원을 마련해줬어요. 4호선 숙대입구역 앞에서 《빅이슈》 파는 사람을 봤어요. 제가 교회 간사님한테 물어봐서 2018년 9월 18일에 빅이슈 사무실에 간사님하고 같이 찾아왔어요. 그때부터 빅판 일을 했지요. 

코: 비슷한 시기에 삼일교회에서 여기 계시는 곽창갑 빅판과 두 분이 함께 빅이슈에 오셨어요. 세 분 다 삼일교회에서 고시원을 지원해주고 있었거든요. 곽창갑 빅판은 지금까지 빅판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계신데, 다른 분들은 얼마 못 가 빅판 활동을 종료하셨어요.


김: 곽창갑 빅판께서 다른 홈리스들한테 빅이슈 판매원 일거리를 추천해주신다고 들었어요. 

곽: 토요일마다 서울역에 가거든요. 놀러 가는 거예요. 사람이 많으니까. 거기서 만났었던 거리 노숙하시는 분들한테 《빅이슈》 팔라고 말해줘요. 

코: 제가 본가에 내려가려고 어느 금요일 저녁에 서울역에 갔더니 곽창갑 빅판께서 계시더라고요. 집에 있으면 심심하니까 사람 구경도 할 겸 나왔다고 하시더라고요. 돌아다니다가 빅이슈 판매원으로 자립 활동을 해보시길 권하시는 것 같아요. 

김: 서울역이 익숙하신가 봐요.  

곽: 사람들을 다 알아요. 고시원 사는 사람도 일하고 싶어 하면 《빅이슈》를 소개해주고 그래요. 네 명이나 왔어요. 

김: 영업왕이시네요.(웃음) 그분들은 계속 판매하고 계신가요?

코: 지금은 안 하세요. 《《빅이슈》는 매일 판매가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큰 용기가 필요하기에 중간에 포기하는 분이 많아요. 그래도 빅판에 도전했다는 사실에 감사하죠. 한 번 도전했던 분들은 다시 도전해보기 위해 돌아오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희는 주거취약계층 분들이 빅이슈 판매를 통한 자립 활동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두고 있어요.

김: 곽창갑 빅판께서도 처음에 빅판 일이 어렵지는 않으셨어요?

곽: 괜찮아요. 어려운 거 없어요. 처음에 팔 때 술 마신 사람들이 와서 시비 걸고 그래서 힘든 적은 있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김: 현재 빅판으로 4년째 일하고 계신데 어떤 때 기운이 나시나요? 

곽: 《빅이슈》를 팔고 있으면 손님들이 커피나 음료수를 갖다주거든요. 지난번에는 임대주택에 들어갔다고 하니까 한 독자분이 참치 캔을 한 박스 줬어요. 

김: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신다고 들었어요. 

곽: 삼일교회에서 화요일마다 노숙하는 사람들은 배고프니까 컵밥을 나눠 주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저도 그전에 노숙하면서 컵밥을 먹었거든요. 

코: 원래는 교회 분들이 주로 봉사활동을 나가시는데, 곽창갑 빅판은 노숙 상황에 있던 당사자였기에 서울역에 있는 분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같이 다니셨던 것 같아요. 삼일교회에서 컵밥 나눠 주거나 다일공동체의 밥퍼 같은 자원봉사 활동 나올 때 일정 주기로 빅이슈 직원들도 동행해서 안내 책자를 나눠 드리는데, 곽창갑 빅판께서 가끔 그 활동도 함께 하세요. 지금은 코로나이기도 하고 곽창갑 빅판도 힘들어서 쉬고 있는 상태예요. 

곽: 교회에서 장례식도 치러줬어요. 노숙하던 사람들 장례식에 네 번이나 갔지요. 고시원에서 살다가 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제가 알던 분들인데 술을 많이 마셔서…. 그분들 돌아가시기 전에 요양병원에 있었는데 병문안 갔다가 요양보호사분들이 일하시는 걸 봤어요. 저도 환자들 목욕시키는 일을 하고 싶어요. 나중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싶어요. 

김: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고 싶으신가 봐요. 

곽: 네, 사람들 도와주면 뿌듯하고 좋아요.   

   

사랑하는 이와 함께홈 스위트 홈 


김: 임대주택 들어간 데는 어떠세요?

곽: 괜찮아요. 

김: 판매처까지 금방 가시죠?

곽: 괜찮아요. 제가 영등포구청역 근방에 사는데 광화문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요. 5호선 타고 가면 광화문까지 금방 가거든요. 

김: 그 외에는 생활하기가 어떠세요? 

곽: 괜찮아요. 고시원에 있을 때는 좁아가지고…. 지금은 8평인가 그래요. 

김: 지난번 인터뷰에 보니까 임대주택 들어가고 나서 자랑을 많이 하신다고 해서 어떤 점이 그리 좋은지 궁금해서 여쭤봤어요.(웃음) 

코: 곽창갑 빅판께서는 너무 좋다, 어느 부분이 어떻게 좋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같은 말을 여러 번 표현하세요. 좋다는 말을 오늘 아침에 와서 하고, 집에 갈 때 하고, 내일 또 하고 이런 식으로요. 선생님, 결혼하신 얘기도 좀 해주세요. 

김: 어머, 축하드려요~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곽: 올해 4월에 만났어요. 같이 살고 있지요. 서울역에서 만났어요. 같이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제가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으니 같이 살자고 했어요.

코: 매주 서울역에 놀러 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분하고 만나서 여러 번 밥도 같이 먹고 얘기도 오래 나누셨대요. 그러면서 호감이 생겨서 같이 살자고 얘기하신 것 같아요. 

곽: 영등포구청에 같이 가서 혼인신고도 했어요. 아내 집이 대구거든요. 대구 가서 아버지(장인) 만나서 허락도 받았어요. 광주에는 코로나19 때문에 못 내려갔어요. 추석 때 집에도 못 내려가요. 엄마가 내려오지 말래요.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집에서 여덟 명이 만나면 신고 들어온다고.

김: 아쉬우시겠어요. 아내분하고는 주로 집에서 뭐 하면서 지내세요?

곽: 제가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같이 음식 배달시켜 먹어요. 아내가 휴대폰으로 주문을 다 해줘요. 어제는 닭도리탕 시켜 먹었어요. 아내도 장애가 있어요. 지적장애 6급이고, 저도 지적장애 있어요. 3급이에요. 괜찮아요. 집에 들어가면 맞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괜찮아요. 토요일에 놀러 가고 그래요. 어린이대공원 가서 동물도 보고, 전주도 가고, 대구도 가고. 

코: 원래는 심심하다며 서울역에 자주 가셨는데, 이제는 같이 나들이할 분이 있으니까 여기저기 많이 다니시더라고요. 

김: 이번 추석 때는 어디 가실 거예요? 

곽: 추석 때 대구 내려가야 돼요. 아버지(장인)가 있어가지고. 

김: 나중에 아내분이랑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세요? 

곽: 제주도에 같이 가기로 했는데 아직 못 갔어요. 제가 고향이 전라도 완도예요. 완도에서 살다가 광주로 이사 왔어요. 

김: 광주 집에는 어머니하고 또 누가 계세요?

곽: 막내하고 엄마하고 같이 있거든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세 사람은 돌아가셨거든요. 형제는 4남 1녀고 저는 둘째예요. 셋째하고 넷째는 결혼했는데, 첫째하고 저하고 막내는 결혼 안 했거든요. 

김: 선생님은 결혼하셨는데? 아,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거군요!

곽: 네. 광주 가서 결혼식 하고 싶어요. 어머니 있는 데서. 교회에서 하고 싶어요. 

김: 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혹시 기억나는 장면이 있으세요? 김이 유명한 걸로 아는데. 

곽: 완도는 김도 유명하고 전복도 유명해요. 김 건조장이 있어서 거기에 발장 끼워가지고 말리거든요. 김발 하다가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광주로 올라왔어요. 

김: 학교 다닐 때 기억나는 일이 있으세요?

곽: 학교는 국민학교밖에 안 나왔어요. 

김: 지금 50~60대 분들은 대체로 국민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직하셨더라고요. 선생님도 졸업하고 바로 일하러 가셨어요? 

곽: 네. 국민학교 나와서 공장에 있었거든요. 가구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페인트칠하다 보면 냄새가 많이 나서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그리고 새우잡이 배도 탔어요. 전라도 목포에서 새우 요만한 거 잡았어요. 한 번 나가면 계속 살거든요, 바다에서. 파도 조심하라고 주의보 떨어지면 피하는데, 안 떨어지면 바다에서 계속 살아야 돼요. 2월부터 12월까지. 

김: 열 달을 바다에 계속 있어야 한다고요? 저녁에는 육지에 들어와서 자는 거죠?

곽: 잠도 배에서 자고, 밥도 배에서 해 먹어요. 한 배에 여덟 명 정도 타요. 큰 배예요. 새우로 젓갈을 만들어요. 소금에 간해서 도라무통(드럼통)에 잇빠이(가득) 담아가지고 운반선이 와서 수협에 싣고 가요. 11월에 끝나면 집에 가고 그래요. 그때 되면 월급 계산해서 집으로 가져가요. 2월부터 타서 11월까지 일한 거 다 합쳐서 190만 원(2021년 기준 환산 시 약 650만 원) 받은 적 있어요. 그때가 중학교 때인가 그랬어요. 

김: 1985년 무렵이었겠네요. 당시에 190만 원이면 큰돈인데, 그 돈으로 뭐 하셨어요? 

곽: 집에, 엄마 아빠한테 용돈으로 쓰라고 줬어요. 군산에서 일할 때도 엄마한테 통장에 한 달에 14만 원씩 넣어줬거든요.

김: 월급이 15만 원인데 그럼 한 달에 1만 원으로 생활하신 거예요?

곽: 네, 거기도 용돈은 가불해서 쓸 수 있거든요. 군산에 있을 때도 2년간 집에 돈 부쳐줬어요. 

김: 전에는 바다를 오래 보셨고 지금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많이 보시는데, 빅판으로 일하는 거 어떠세요? 전과 비교하면?

곽: 광화문에서 판매하는 거, 지금은 괜찮아요. 바다에 있는 것보다 여기서 《빅이슈》 파는 게 나아요. 

김: 사람들을 보는 게 좋으신가 봐요.

곽: 좋아요. 괜찮아요. 그리고 손님들이 책 사가면서 음료수랑 커피 같은 거 사줘요. 마스크도 한 박스씩 갖다주고요. 

김: 앞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뭔가요?

곽: 꾸준히 빅판 해야죠. 빅판 끝나면 자격증 하나 따가지고 요양보호사 해보려고요. 

김: 또 소망이 있다면요?

곽: 고향 가서 전복 기르고 싶어요. 전복이 처음에는 손마디만 한데 키우다 보면 손바닥만 해져요. 미역이랑 다시다를 밥으로 주면서 7년 동안 키워야 해요. 

김: 다시 완도에서 살고 싶으신 거예요?

곽: 네, 고향에 가려고요. 완도에 친척이 살고 있어요.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아내랑 살려고요.     


바다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한 달에 15만 원을 받았다는 말에 기가 찼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저임금법 제7조에 ‘정신장애나 신체장애로 근로 능력이 현저히 낮은 사람,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대해선 최저임금 효력을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최저임금법은 고용주가 장애인을 착취하도록 용인한다. 전국 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최저임금법 제7조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국회에서 이 주장을 조속히 받아들여 관련 법을 개정하길 바란다.  

그는 바다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한다. 김발이며 멸치잡이며 바다가 지긋지긋할 법도 한데, 아내와 함께 완도로 돌아가서 전복 농사를 짓고 싶어 한다. 사랑하는 이와 바닷가 마을에서 살고 싶은 그의 소망이 언젠가 이뤄지길 기원해본다. 그 전까지는 《빅이슈》 판매원으로서 건강하게 광화문역 5번 출구를 지켜주시면 좋겠다.      


글/ 김은화, 사진/ 김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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