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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Oct 18. 2021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어디엔가 있는 네버랜드

사람은 누구나,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숙하기 마련이죠. 만 11세 되던 해에 마법 학교의 입학통지서는 날아오지 않았고, 크리스마스 전날 밤의 썰매 소리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을 만큼 늙었지만, 저는요, 아직 상식이나 현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요, 두 눈으로 직접 봤거든요. 요정이 태어나는 순간이라고 믿을 만큼 순수한 갓난아이의 웃음, 눈동자 속에 흐르는 은하수, 그리고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약속 같은 것들을. 오늘은 그 반짝이는 것들을 기억해내기 위해 내 친구 윤지의 집으로 갑니다.





Q.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대 초반에는 막 알을 깨고 나온 아기 새처럼 많은 게 서툴렀던 것 같아. 그렇지만 참 젊었고,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해. 이제 늘 기쁠 수만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잖아.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몰랐던 감정을 하나둘 알게 되고 그것들에 이름표를 붙이는 과정인 것 같아.


우리 즉흥적인 걸 참 좋아했지. 어느 날엔 서울 남산 근처를 지나다가 갑자기 꼭대기에 가고 싶어서 무작정 걸어 올라갔잖아. 남산타워에 침입하다가 경보가 울리는 바람에 CCTV에 죄송하다고 허리 굽혀 인사하며 도망갔었고. 그날 맥주 한 캔씩 마시며 많은 얘기를 나눴지. 그때가 내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던 순간이야. 그 전에는 마음속 깊숙이 들어있는 것을 꺼내면 친구들이 떠날까 봐 말하지 못했었어.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믿음이 있고,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야.


나에겐 함께 있으면 모든 고민을 다 잊을 수 있는 친구가 한 명 더 있었어. 얼마 전에 하늘로 떠나보냈는데,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언젠가 E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때, 스무 살 무렵 나와 E가 함께 찍은 사진이 답장으로 왔어. 그리고 E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평생 친구 하자며 매년 사진을 찍고, 우리 팔순 잔치 때 그 기록들을 전시하자고 약속했었지. 그렇게 가까운 사람이 떠나고 느낀 건데, 만약 내가 갑자기 죽으면 평소에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아무도 모를 것 같았어. 그래서 최근에 유언장을 미리 써봤어. 남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슬퍼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모습 그대로 살았으면 좋겠더라. E를 잃고 내가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이 있었는데, E는 내가 행복하길 바랄 것 같았어. 그래서 진심으로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





Q. 우리가 먼 곳으로 떠난다면 사람들은 방에 남겨진 물건들 따위로 우리를 기억하거나 유추하겠지.


내가 나이를 먹어도 내 기억 속 E는 영원히 아주 젊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거라는 사실이 무척 슬퍼. 내게는 추억 상자가 있는데, 거기에 기억하고 싶은 편지나 사진 같은 것을 전부 모아뒀어. 나는 추억에 사는 사람이라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들을 꺼내 보고는 해. E와 함께 찍은 스티커 사진들도 있어. 이사 다닐 때마다 꼭 챙기는 것 중 하나야.


Q. 내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잊지 않기 위해 몸에 새겼어. 아무리 연약해져도 보살피고 지켜주는 것,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어 있는 느낌, 그것이 어쩌면 내가 친구와 집에 바라는 점이기도 해.


석 달쯤 전에 이 집으로 이사 왔는데, 생애 처음으로 전세 계약을 했어. 제대로 된 집에 산다는 건 심리적으로 엄청난 안정감을 주는 것 같아. 내가 집에 크게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월세나 중·단기로 계약한 학교 앞 집, 고시원 등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지낼 때는 알게 모르게 불안했었나 봐.


이 집에 오기 전에는 원룸에만 살아서 현관문을 열면 집안이 한눈에 다 보였어. 지금 사는 곳은 조금 분리된 듯한 골방 같은 공간이 있어. 심적으로 많이 힘들 때, 집 안의 불을 죄 끄고 그 방에 들어가 앉아 있는데 아늑했어.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는 나만의 공간이라 나를 완전히 쏟아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내 집이 참 좋아. 원래 먼저 계약한 집이 있었는 데, 한 번만 더 둘러보자 하고 다니다가 여길 발견해서 앞선 계약을 파기하고 이곳으로 왔어. 가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해도 그걸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었지.





Q. 직접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을 테고, 처음에는 이 집이 네 물건으로 가득 차 있지도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어떤 점이 이 집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했을까?


골방 같은 독립 공간이 있다는 점이 일단 좋았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라 깔끔했고. 그리고 원룸에서는 하늘을 못 보고 살았는데 여기서는 하늘이 아주 잘 보이는 거야. 그 점도 좋았어. 지금 다니는 회사에 처음 다닐 때만 해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 근처에 집을 계약해서 1년 정도 살았거든. 그 기억이 좋아서 새로 집을 구할 때 이 동네에 머무르고 싶었어. 안식처처럼 느껴져서.


이 집을 처음 보러 왔을 때 먼저 살던 사람의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텅 비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아늑하다고 느꼈어. 그래서 그 포근함을 내가 가져야겠다 싶었지, 이 아늑함은 이제 제 겁니다.(웃음)





Q. 석 달 정도 살았는데 어때, 그때 느낀 아늑함은 여전해?


응, 집이 넓은 편이 아니어서 더 그런 것 같아. 이 가구들도 다 내가 내 돈 주고 산 것들이야. 침대며 책상, 행어, TV, 소파, 전자레인지 등등 모든 것에 내 손때가 묻어 있지. 이전까지 살던 집은 다 풀옵션 월세여서 침대나 책상도 있던 거 쓰고 그랬어. 그때 가구들은 내가 떠나면 다시 남남이 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가구들은 앞으로도 나와 함께하겠지. 그래서 더 내 것 같아.


Q.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면 언제야?


내가 원래 옷 입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웃음) 샤워하고 나와서 갓 태어났을 때의 모습으로 침대에 올라가서 창문을 활짝 열고 하늘 보는 걸 좋아해. 원룸촌에 살 때는 창을 열면 집 안에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어. 다른 집이 바로 앞에 있거든. 근데 이곳은 창밖으로 보이는 건 하늘뿐이야. 고등학생 때는 노을이 잘 보이는 곳에 살았거든. 하교하면서 하늘을 보면 대자연 앞에서 내가 한없이 작아지고, 나의 걱정이나 고민들도 덩달아 작게 느껴졌어. 그래서 하늘을 보면 걱정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야. 늘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그래.


이런 내 마음이 반영된 부분이 있다면 침대를 창문 옆에 뒀다는 점이겠지. 창가 공간에 맞추기 위해서 침대 일부도 떼어냈어. 나는 얽매이는 걸 싫어하고 자유로운 게 좋은데, 그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깨고 잠들 때 늘 하늘을 볼 수 있게 됐지.





Q. 우리 같이 방황했었잖아. 요즘은 어떤 것 같아? 나는 분명 저 멀리 어디엔가 있을 곳에 가는 꿈을 꾸고 있는 데, 그게 손톱만큼 작아질 때도 있고, 쟁반같이 크게 보일 때도 있어. 집이 생기고, 집 평수가 넓어지고, 이런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걸까? 적당히 포기할 줄 알고, 언젠가의 네가 말한 것처럼 심심해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걸까?


난 지금도 계속 방황하는 것 같아. 평생 이럴 것 같고. 살아간다는 건 그 혼란 속에서 나를 알아가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잖아. 나이를 먹을수록 심심해진다 말은 그때 내 안에 열정이 없어져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 나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하고 싶은 걸 미루지 않고 다 해내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각날 때마다 사랑한다고 얘기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누구에게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어디엔가 꼭 있을 거야. 중요한 건 그 사랑을 스스로 깨닫는 일인 것 같아.





창문은 항상 열어놓기


달은 낮에도 계속 떠 있다고 합니다. 어디엔가 늘 그곳에 있지만 여러 가지 변수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일 때도 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윤지와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낮달에 우리만의 의미를 부여하자. 낮달을 늘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볼 수도 있으니까. 약속을 잊을 수도 있지만 갑자기 생각날 수도 있으니까. 사는 게 힘들고 시시하게 느껴질 때, 낮달이 보이면 소중한 사람들과 나 자신을 생각하자고요. 낮달을 보면 사진을 찍어 보내자고, 그러니까 창문은 항상 열어놓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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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은식 | 사진. 이규연


*전문은 빅이슈 260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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