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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Nov 26. 2021

[EDITORIAL] 청낙원

아주 작은 선의에 기대어 연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저희 집 앞에는 작은 동산이 있는데요. 집 창문에서 보면 여름에는 숲이 울창하고 가을에는 붉은빛으로 나뭇잎 색이 변하는 게 퍽 아름답습니다. 보고 있노라면 ‘이번 주말에는 저 숲으로 가볼까.’ 싶어지는데. 역시, 항상 보기만 하고 바로 코앞인 그곳까지 가지는 않게 됩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나 있어서 거길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남의 아파트 단지를 통과해야 하거든요.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공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 남의 고급 아파트 뒷문이라는 게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내서 ‘마치 그 아파트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어깨를 쭉 펴고 아파트 단지를 관통해 뒷산으로 간 적이 있습니다. 일요일 오후 2~3시 밝은 대낮이었는데, 좁은 오솔길 반대편에서는 할머니 두 분이 걸어오고 계셨어요. 뭔가 산에서 나는 열매를 채취하신 듯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계셨어요. 왠지 위축돼서 할머니들 옆으로 비켜서는데 산길을 혼자 걷는 저를 향해 할머니 한 분이 말씀하셨어요. “이런 데 혼자 다니면 안 돼. 큰일 나.” 대낮이었는데도 숲이 우거진 방향은 어둑어둑했어요. 유명한 등산로가 아니고 작은 숲길이라 사람도 적었고요. 그 말씀을 듣자마자 불현듯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감사합니다. 근데 괜찮아요.”라고 답하고 좀 밝은 정자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근데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 두 분이 방향을 바꿔서 제 뒤를 쫓아오고 계시더라고요. 헉, 무서워. 할머니가 더 무서워요!

출처: Unsplash

정자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할머니들이 옆에 앉으시더니 다시 말을 거셨어요. “아가씨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니까 같이 가지 왜 그렇게 빨리 뛰어가. 헥헥.” 할머니들은 작은 백팩에서 텀블러와 떡을 꺼내더니 저에게 먹으라며 손짓을 하셨어요. 주는 건 또 절대 마다하지 않는 저는 물은 먹는 시늉만 하고 떡을 한 입 먹었습니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아랫동네의 파란 지붕에 늦은 오후의 햇빛이 반사되어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할머니들은 혹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게 아닐까. 혹시 여기가 낙원인가? 평소 가지도 않던 집 앞 동산에 왜 그날따라 올라보고 싶었을까. 콩이 알알이 박힌 찰떡은 또 왜 이렇게 맛있나. 할머니들은 여자 혼자 추리닝만 입고 어두운 오솔길을 걷는 게 걱정이 돼서 제 뒤를 따라 오신 거였어요. 가던 길과 반대 방향인데도 불구하고요. 떡을 잘 먹는 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할머니가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데서 갑자기 나쁜 일 생기고 그러는 거야. 앞으론 혼자 다니지 말고 신랑이랑 다녀.”

네…라고 대답하다가 갑자기 할머니한테 장난을 치고 싶어졌어요. “근데 할머니 제 신랑은 하나님이에요.” “뭔 소리야. 아가씨 교회 다녀?” “아니요. 어디 계신다고는 하는데 제 눈엔 안 보이거든요.” 제 유머를 이해하지 못하신 할머니들은 고개를 갸웃하시곤, 제가 밝은 길로 가는 걸 보시더니 뒤돌아 가던 길을 향해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날 제가 만난 할머니들도 저를 이상하다 생각하셨겠죠. 그런데 사실 일상에서 만나는 이런 작은 선의들이 있어서 저도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남았고, 빅이슈 역시 사람들의 선의가 있었기에 그간 유지될 수 있었겠죠. 어쩌면 저는 그날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산길에서 혼자 겁도 없이 휘적휘적 걷고 있는 여자가 걱정되어 뒤따라오신 할머니들은 청낙원에 사는 선녀님들일지도. 


편집장 김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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