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살롱 김영옥 대표 인터뷰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은 여성주의 관점에서 나이 듦을 연구하는 단체다. 건강상의 문제나 불안정한 비정규 일터에서부터 일찍이 노년의 어려움에 눈을 뜬 연구자들이 뜻을 모아 설립됐다. 노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노년에 대한 불안이 팽배한 사회에서 옥희살롱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는 병든 몸, 나이 듦과 돌봄, 죽음을 공적인 담론으로 확장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문제에 대응하며 새로운 생애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옥희살롱의 김영옥 대표와 노년이 겪는 어려움과 청년이 내다보는 노년의 불안을 타개할 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잘난 노년과 고립되고 빈곤에 허덕이는 노년을 나누어 양극화시키는 건 노년을 보통 사람의 범주 바깥으로 밀어내는 거라고 생각한다. 10인 10색, 100인 100색이라는 말을 하는데, 왜 노년은 10인, 100인이어도 색은 두 개여야 되나? 이것은 단순히 현재 노년으로 살고 있는 당사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비노년인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거다. 노년은 누구나 반드시 맞이하게 될 생애 단계다. 생애 단계를 준비하는 것은 현재 노년인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노년의 10인 10색 독자성, 자서전적 개별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얼마 전, 강연을 하고 20대 여성분께 같은 질문을 받았다. 우리 세대는 비혼을 지향하는 추세인데 의존적 삶, 돌봄이 필요한 삶에 대한 걱정이 커지면서 정상 가족으로 돌아가야 하느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고. 함께 비혼 생활을 해나갈 동료들의 숫자가 줄어들다 보니까 불안하다더라. 그때 내가 한 답은 청년들이 늙음을 너무 모른다는 거였다. 구체적으로 늙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늙어서 의존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지, 즉 의존 상태에서 필요한 도움이 뭔지 알면 알수록 대면하기가 좀 쉬울 거다. 그 상태를 더 잘 이해하면 어떤 돌봄 제공자를 만나는 게 적절한가에 대해 설계를 할 수 있다. 늙은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고, 구체적인 돌봄 현장에서 그 의존 상태를 감각하지도 않은 채 막연히 50년 후의 삶에 대해서 불안을 앞당겨서 갖는 거다.
정상가족이 아닌 공동체란 한 지붕 아래 살든, 근거리에 살면서 안부를 묻는 사이든 넓은 의미의 친밀한 관계일 거다. 서로 돌보고 마음을 쓰는 관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것을 연습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옆에서 만나본 적이 없으면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자기의 돌봄 역량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누구를 얼마큼 돌볼 수 있나, 그리고 나는 누구한테 얼마큼 돌봄을 받을 수 있나, 이건 다 역량의 문제다. 돌봄을 받는 것도 돌봄을 하는 것만큼이나 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나를 돌보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어떤지, 그의 돌봄 방식이 내가 받고자 하는 방식인지, 아니라면 어떻게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지 눈치를 봐야 한다. 저 사람이 나를 돌보느라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까지 고민해야 한다.
돌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돌봄은 마음을 쓰는 일인데 이게 내 능력을 넘어서면 나를 파괴하고 상대방을 파괴한다. 그러니까 마음을 내려놓기도 해야 한다. 옥희살롱이 올해 요양보호사분들의 돌봄 경험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시민들의 공통 자산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그때 나를 강타한 그분들의 말씀 중 하나가 바로 그거였다. “요양원에 출근하기 전에 집에다 마음을 내려놓고 간다.” 토끼가 간을 빼놓고 용궁에 가는 것과 똑같다. 마음을 쓰는 돌봄을 잘하려면 마음을 내려놔야 된단 거다. 역설이고 모순이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는 것과 떨어지는 것을 어떻게 잘 조절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 세 가지가 없으면 생존이 안 되지만 노년에게만 생존이 삶이라고 하는 건 문제적이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역량 이론’을 굉장히 열심히 전개했는데 저서 <지혜롭게 나이든다는 것>에서 역량 이론이 노년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한다. 어린아이 때부터 자기 성취와 사회 기여 양측을 다 수행할 수 있는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역량이 있다면, 노년들도 계속 그 역량을 키워야 하고 역량을 키울 것을 사회에, 국가에, 이웃에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역량은 크게 세 단계로, 하나는 생존을 포함하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생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생각 있는 삶을 살게 해주고 공론장에 초대하고 의견을 물어보기도 하고, 생각이나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과 지적인 행사에 초대해야 한다. 그다음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놀이하는 인간이다. 노인도 노래하고 춤추고 섹스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자본이 권력인 세계에서는 돈이 있는 사람, 계급이 높은 사람은 첫 번째는 물론이고 두 번째, 세 번째를 다 누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두 번째, 세 번째를 누리지 못했던 사람은 죽을 때까지 첫 번째 생존 단계에 매달리게 되는 상황을 국가와 시민사회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나만 해도 노인들이 없는 카페에는 출입하기 어렵다. 게다가 공항에서 티켓팅 하는 게 정말 어려운데 천천히 하려고 하면 바로 달려와서 도와준다. 이것도 반드시 유쾌한 일은 아니다. 적절한 돌봄이 되려면 멀찍이 기다리고 있다가 ‘이거 좀 어렵네. 누가 날 도와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했을 때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내가 도와주실 수 있냐고 물어볼 때 도움이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말한 모든 것이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가능하다. 자본은 점잖음이 무엇인지 안다는 거다. 우리는 자본과 소비 중심 사회에 살면서 노년의 권위와 존엄을 소비 중심으로 재편하는 이 현실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좀 들어야 하는데 얘기를 너무 싸잡아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싫다는 걸 표현하는 용어가 다양해지면 좋겠다. 한국어는 형용사와 부사가 발달해 있는 언어인데 노인을 지칭하거나 묘사하는 문장에는 형용사가 아주 빈곤하게 등장한다. ‘추하다’, ‘꼰대다’처럼. 꼰대는 감수성의 척도를 가리키는 말이지 나이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20대의 누군가가 성질을 부리면 다른 용어를 찾거나 저 사람이 왜 성질을 부리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70대가 성질을 부리면 바로 꼰대로 가버린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거다.
젊은 사람들이 당사자성을 가지고 돌봄이 필요한 노년, 의존이 필요한 노년을 지키는 것은 모든 시민의 덕성이 되어야 하고, 책임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바로 노후 준비다. 노년 혐오가 여전한 상태에서 국가 책임제를 논하는 건 별 소용이 없다. 노년이 존엄한 삶, 돌봄 때문에 불가촉천민이 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공통의 감각이 없는 상황에서 국가가 제대로 책임져주지 않을 거고 효과 없을 거다.
그렇기에 10대부터 80대까지 골고루 노년의 의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생겨야 한다. 노년은 오지 않은 미래라고 생각하니까 젊었을 때 당사자가 되기 어렵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노년은 이미 와 있는 미래고 도래한 미래다. 시간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조금 더 활성화하면 60대, 70대, 80대의 자신이 지금의 나에게서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
글. 양수복 | 사진. 김근정
전문은 빅이슈 266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