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면 어김없이 영화계도 한 해를 정리하기 위해 분주하다. 여기저기서 시상식이 열리고 ‘올해의 영화 베스트’ 리스트를 내며 결산과 총정리의 시간을 갖는다. 나 역시 이런저런 일로 한 해 독립영화를 돌아보는 대담 자리에 참석해 비평적 측면에서 최신의 영화들에서 감지되는 흐름을 읽어보고 영화 산업이 직면한 중층의 어려움을 짚어보기도 했다. 아주 오래된 구조적 문제가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한 것만은 확실한데 당장의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아 내내 답답했다. ‘자구책 마련과 독립영화의 돌파력’이라는 건 그저 허공의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다.
올해의 영화 목록도 정리해볼 생각이다. 별점이나 순위를 매기려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이유와 고려 속에서 개별 영화의 의미를 평가하고 가치를 헤아려보고 싶다. 그에 관해서는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올해 영화로 만난 사람들, 그 인연을 생각해보는 일도 빠질 수 없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영화 일을 하다 보면 집중적으로 사람들과 만날 때가 있다. 영화제 기간이 대표적이다. 하루에도 극장에서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고 인사하고 간단한 안부를 묻고, 언제일지 모를 다음을 기약하며 각자의 상영 스케줄에 맞춰 발길을 옮긴다. 말 그대로, 스치듯, 안녕이다 보니 이 틈바구니에서 마음 편히 이야기를 나누기란 어쩐지 부담스럽고 민망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만난 그 순간에 집중하자’이다. 그 후는? 말 그대로 ‘그 후’에 맡기는 수밖에.
‘그 후’를 보게 해준 영화 <너에게 가는 길>
그 와중에 어떤 영화는 정말 ‘그 후’를 보게 해준다. 즉, 인연이 되는 것이다. 지난해 11월에 개봉하고 현재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인 변규리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너에게 가는 길>(2021)이 내게는 그런 영화다. 지난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처음 공개됐을 때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며 이 영화와 처음 만났다. 변규리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 <플레이온>(2017)이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도 관객과의 대화를 함께했던 터라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의 첫 대화 자리를 같이한다는 게 좀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영화의 주인공은 성소수자 당사자와 한국의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활동하는 부모들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성소수자 당사자에 관한 영화는 볼 기회가 있지만, 그 부모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국내 영화는 내가 알기로는 처음이다. 소방 공무원인 나비 씨와 항공 승무원인 비비안 씨는 자식의 커밍아웃 이후 자식과 함께 살아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활동해간다. 단지 ‘내 자식만’을 위한 일은 아니다. 자식과 자식 또래가 무방비로 혐오, 차별, 폭력에 노출돼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앞선 세대로서 더는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책임감으로 읽힌다. 함께 살자는 제안과 의지로도 읽힌다. 그리하여 2014년 자조 모임으로 시작한 성소수자부모모임은 2018년 성소수자 부모, 가족, 당사자가 함께하는 인권 단체로 거듭났다. 지금 이 시각에도 홀로 외롭게 벽장 속에 있을 당신에게 ‘여기 우리가 있어요!’라며 손을 내밀기 위해서.
지난해 시작된 <너에게 가는 길>과의 연이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올해 11월 말 다시 이어졌다. 전주국제영화제 때 그 멤버 그대로 변규리 감독, 나비 씨, 비비안 씨와 함께 극장에서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처음 출연한 영화로 국내외 영화제 상영을 하고 개봉까지 거치며 관객과의 대화를 무려 100번 이상 하게 된 이 시간이 나비, 비비안 씨에게는 어떤 기억, 사건으로 남고 동력이 될까를 묻는 일로 시작했다. 개봉 1주년을 맞아 관객들을 향한 나비 씨의 편지를 전해 듣기도 했다. 설레고 긴장된 마음이 컸던 첫 공개 때와는 달리 감독, 출연자 모두 시간의 더께 속에서 더 단단하고 힘찬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야기는 계속됐다. 성소수자부모모임도 그러하지만, 사회적 참사 앞에서 같은 처지의 비슷한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에게 위로받는 자조 모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기도 한다. 자식의 커밍아웃 이후 부모가 적극적으로 자식을 응원하고 동행하는 영화 속 부모 자식 관계가 혹여나 누군가에게는 너무 ‘이상적’으로만 비쳐 좌절감만 안길까 하는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성소수자 당사자와 부모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영화의 명확한 뜻과 방향이 있었다. 자식과 부모 사이가 역할, 책무, 위계로 점철되는 게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갈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한다. ‘누구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나비’, ‘비비안’으로서, 즉 스스로 이름 붙인 활동명으로서 세상 앞에 제 목소리를 내는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과정도 강조한다. “점점 더 좋아지는 게 사실이다. 편안해지고 당당해지고 배짱이 생긴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내 삶을 잘 살겠다고 마음먹는 게 다행이라 생각한다. 힘든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이라 다행이다.” 영화에서 나비 씨가 했던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고 더 깊은 울림으로 공명한다.
무엇보다 그날의 관객들 역시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주고 들려줬다는 걸 꼭 말하고 싶다. ‘당신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 ‘여기서 더 이야기해도 좋다’는 이해와 공감, 환대의 시그널이 그날 그곳에 있던 서로 간에 오가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고백들이다. <너에게 가는 길>이라는 영화와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만들어낸 대단한 일이다. 그 여정 속에 함께하고 있다니.
이 일을 시작한 이후 많은 부분 영화에 빚졌다. 영화가 정말 많은 걸 내게 내줬다. 좁쌀만 한, 한 줌의 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넓어질 수 있었다면 그건 영화와 영화로 만난 인연들 덕이다. 한 해가 가는 길목에서 다시 만난 <너에게 가는 길>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확인한다. ‘너’에게 가는 길이 ‘나’를 다시 세우는 길이기도 하다. ‘너와 나’의 길, 함께 가는 길이다. 그 길 덕분에 올해도 여기까지 왔다. 그 길 위에서 또 어느 날 우연히 다시 만나면 좋겠다. 내년에도 인연이 계속되길 바라면서.
글.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