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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밭골샌님 Mar 13. 2024

골목길 야생화 4 냉이

봄의 햇빛과 흙냄새를 품다


오래전에 나온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앞머리에는 두 편의 시가 소개됩니다.

서양의 대표적 시인 테니슨과 일본 하이쿠의 거장 마쓰오 바쇼(松尾芭蕉)가 지은 것입니다.

우선 테니슨의 시 보시죠.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손안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 그러나 만약 내가/
뿌리째 너를, 너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신과 인간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으련만.

일본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俳句) 한 수.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신과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기 위해 꽃을 뿌리째 뽑아 드는 서양의 소유적 실존 양식.
단지 눈여겨 살펴볼 뿐인 동양의 존재적 실존 양식.
프롬은 이 둘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소유적 실존을 토대로 구축된 현대 산업사회.
소외된 다수로 건강하지 못하죠?
'지금 여기'를 중시하는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의 회귀만이 해결책이라는 게 이 책의 주제입니다.

오늘 메뉴는 냉잇국, 아니 냉이 꽃입니다.

흰색의 냉이 꽃. 꽃잎이 4 장인 십자화과에 속한다.


이른 봄의 냉이는 보양식과 다름없죠?
기나긴 겨울의 터널을 벗어날 때쯤, 우리 몸에 부족한 영양소를 가진 나물들이 새삼 입맛을 돋우죠.
그 대표 선수가 바로 냉이입니다.


그런데, 꽃 피고 나면 냉이는 먹을 수 없다고 해요.
그전에 부지런을 떠는 사람에게만 상큼한 맛을 허락한다는 걸까요?
그래도 굳이 먹어야겠다는 일념에 침을 흘리시는 분들껜 다행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냉이는 초봄부터 줄기차게 싹을 틔워요.
심지어는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도 싹을 냅니다.

지역에 따라 냉이를 나생이, 나숭게, 나잉개, 나승구, 내생이라고도 부르는데요.
낳다(生) 또는 낫에 접미사 -이가 합쳐져서 파생된 말이라는 연구가 있군요.
학명은 Capsella bursa-pastoris.

십자화과의 두해살이풀입니다.
십자화과란 꽃이 열 십(十) 자 모양으로 피는 종류를 말해요.
한국을 비롯해 세계의 온대 지방에 분포해요.
들이나 밭 도심 속 빈터 어디서든 자라죠.

전체에 털이 있고 줄기는 곧게 서며 가지를 칩니다.
높이는 10~50cm.
뿌리잎은 뭉쳐나는데, 방석처럼 땅바닥에 넓게 펼친 채 겨울을 납니다.
이런 종류를 로제트(rosette) 식물이라고 하죠.

프랑스어로 로제트는 장미를 뜻한다네요.

방사형, 즉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모양이나 문양을 로제트라고 부릅니다.


겨우내 땅에 바짝 붙어 추위를 이겨낸 냉이. 이런 식물을 로제트 식물이라고 한다.


이 방석처럼 생긴 잎들이 겨울 햇빛을 아껴 뿌리와 줄기잎을 만들지요.
줄기잎은 어긋나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집니다.

5~6월에 흰색 꽃이 흐드러집니다.
자잘한 꽃이 꽃대 아래에서부터 위로 끝까지 올라가며 피는데요. 이런 모양을 총상꽃차례(總狀花序)라고 합니다.




꽃받침은 4개로 긴 타원형이고 꽃잎은 거꾸로 선 달걀 모양.
6개의 수술 중 4개가 길며, 가운데 1개의 암술이 있죠.

열매는 편평하고 거꾸로 된 삼각형 모양입니다.
열매 하나에 25개의 씨앗이 들어 있어요.

이른 봄 냉잇국은 식탁에 오르는 봄의 전령사죠.
비타민 B1, C가 풍부하대요.
한방에선 냉이의 모든 부분을 제채(齊寀)라 하여 약재로 쓴대요,
이뇨, 지혈, 해독에 효능이 있고요.
비위허약, 당뇨, 코피, 월경과다, 안질 등에 처방한답니다.

꽃말은 ‘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뿌리부터 줄기, 잎, 이 모든 걸 다 바치기 때문에 붙여졌겠죠?
‘봄색시’라는 꽃말도 있군요.

사실 냉이 꽃은 너무도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마쓰오 바쇼조차도 울타리 곁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탄했을까요.


냉이꽃은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소설가 김훈은 냉이와 된장과 인간이 삼각 치정관계에 있다고 보는군요.
그의 '냉이된장국' 읽어보시죠.

"된장의 친화력은 크고도 깊다. 된장의 친화력은 이중적이다. 된장은 국 속의 다른 재료들과 잘 사귀고, 그 사귐의 결과 인간의 안쪽으로 스민다. 이 친화의 기능은 비논리적이고 원형질적이어서, 분석되지 않는다.

된장과 인간은 치정 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관계이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냄비 속에서 끓여지는 동안, 냉이는 된장의 흡인력의 자장 안으로 끌려들어 가면서도 또 거기에 저항했던 모양이다. 냉이의 저항 흔적은, 냉이 속에 깊이 숨어 있던 봄의 흙냄새, 황토 속으로 스미는 햇빛의 냄새, 싹터오르는 풋것의 비린내를 된장 국물 속으로 모두 풀어 내놓는 평화를 이루고 있다.

이 평화 속에는 산 것은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힘이 들어 있다. 하나의 완연한 세계를 갖는 국물이란 흔치 않다. 된장은 냉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둔다. 냉이 건더기를 건져서 씹어보면, 그 뿌리에는 봄 땅의 부풀어 오르는 힘과 흙냄새를 빨아들이던 가는 실뿌리의 강인함이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이파리에는 봄의 햇살과 더불어 놀던 어린 엽록소의 기쁨이 살아 있다."

 오늘 아침 기온이 0도까지 내려왔네요.
꽃샘추위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기나긴 겨울의 마지막 꼬리쯤은 되겠죠?
봄은 수줍은 듯 소심한 듯 멈칫멈칫하면서도 기어이 온 세상을 꽃잔치 판으로 만들어 놓고 말 겁니다.

꽃들이 초대장 보내고 잔치를 하지는 않죠?

눈 밝은 사람에게 그 속살을 더 잘 보여줍니다.


여기 숲으로 가는 행위 즉 자연을 벗 삼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십시오.


'강둑 위를 환하게 비추는 햇볕의 따스함을 느낄 때, 황금빛 모래를 헤치고 드러난 붉은 흙을 바라볼 때, 부스럭거리는 마른 잎 소리와 개울에서 눈이 녹아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영원의 상속자임을 느낀다. 다른 어느 곳에서 인간 세상의 왕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야생의 숲에서 학생이 되고 자연의 아이가 되고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구도자에게 보낸 편지>


2024년 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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