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수정(受精) 끝난 참나무류, 은행나무가 그렇고요.노란 꽃가루 날리는 소나무도 그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풍매화(風媒花)인데요. 바람 덕분에 시집 장가가는 꽃들.
곤충들을 불러 결혼하는 충매화(蟲媒花)에 비해 꽃들이 예쁘기는커녕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이거나, 심지어 귀찮은 먼지로 여겨지기 쉽지요.
굳이 누구를 꼬셔서 자신의 짝짓기에 이용할 필요가 없는 풍매화는, 날아가기 좋은 꽃가루를 만들어 놓았다가 바람에 실려신부를 만나는 것으로 끝!
아름다운 꽃을만드는 데 쓰이는 에너지가절약되겠죠? 하지만 바람이라는 우연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다 보니, 꽃가루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야 하는 부담은 있어요. 그것도 서둘러서요.
풍매화 종류는 꽃을 일찍 피웁니다.숲이 우거지기 전에 얼른 피워내야, 장애물 없이 멀리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란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골짜기. 그 정체는 소나무 꽃가루다.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는 건 풍매화의 운명이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숫나무가 따로 있어요.
은행 안 열리는 나무는 숫나무인 거죠. 그래서 암수딴그루.
도토리 열리는 참나무류와 솔방울 달리는 소나무류는 암꽃과 수꽃이 한 나무에 있어 암수한그루.
소나무의 꽃가루를 송화(松花) 가루라 하죠?
정확한 표기는 송홧가루.
이게 소나무 수꽃의 꽃가루입니다. 손으로 톡 건드리면 꽃가루가 엄청나게 쏟아져요. 이 가루를 모아 다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지요.
한동안은 차에 노란 꽃가루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어요. 비 온 뒤 생긴 물 웅덩이도 노란색, 집안의 가구도 마찬가지죠. 숲이나 산에서 날아오기도 하지만, 정원수로 인기가 높아진 소나무류가 우리 주변에 흔하기 때문에 더 많아진 겁니다.
도감식 설명 시작합니다.
추가 설명을 바로 뒤에 덧붙일게요.
겉씨식물 구과목 소나무과의 상록침엽교목.
이 말을 풀면요.
겉씨식물 - 씨앗이 밖으로 드러난.
구과(毬果) 목 - 솔방울 달리는 목(目).
소나무과 - 소나무과(科)에 속하는.
상록침엽교목 - 늘 푸른 바늘잎 큰 키나무.
학명은 파이너스 덴시플로라(Pinus densiflora).
꽃이 빽빽한, 산에 나는 나무라는 뜻입니다.
암수한그루. 수꽃은 새 가지 밑부분에 달리며 타원형이고 갈색으로 길이 1cm. 암꽃차례는 새 가지 끝에 2~3개가 돌려나고 달걀 모양으로 길이 6mm.
붉은색의 암꽃은 새 가지 끝에 달리고, 노란색 수꽃은 아래에 달린다. 이처럼 암수의 높낮이가 다른 건 자가수분을 피하고 타가수분을 하기 위한 전략이다.
암꽃이나 수꽃이나 새로 난 가지에서 생기는데, 암꽃은 가지 꼭대기에, 수꽃은 그 아래에 위치합니다.
자가수분(自家受粉)을 피하고 타가수분, 즉 다른 나무에서 온 꽃가루를 받기 위해서지요.
잎은 침엽으로 2개. 잎은 비틀리며, 길이 8~9cm, 폭 1.5mm. 여름에는 진녹색, 겨울에는 연두색으로 2년 후 낙엽이 된다.
상록침엽이라고 해서 낙엽이 지지 않는 건 아닙니다. 2년 뒤 발밑으로 낙엽을 떨궈요.
떨어진 솔잎을 주워서 보면, 2개의 잎이 꼭 붙어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죽어서까지도 함께한다고 해서 솔잎은 부부애의 상징물이 되었어요. 혼례상에도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와 함께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솔가지를 꽂아 놓았답니다.
참고로 잎이 3개면 리기다소나무, 5개면 잣나무.
높이 35m, 지름 1.8m이며 가지가 퍼지고 윗부분의 나무껍질은 적갈색이며, 노목의 나무껍질은 흑갈색이고 거칠며 두껍다.
금강송은 소나무에 비해 줄기가 더 붉고 마디가 길며 곧게 자란다.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나무 다음으로 키가 큰 게 소나무입니다. 나무껍질이 붉은색을 띠는 게 진짜 우리 소나무. 영어명은 재패니즈 레드파인 (Japanese red pine, 일본붉은소나무). 일본이 먼저 세계에 소개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과는 달걀모양이며, 길이 4.5cm, 지름 3cm로 황갈색이고 씨앗바늘은 70-100개이다. 종자는 타원형이며 날개가 있고 길이 5-6mm, 폭 3mm로서 각 씨앗바늘에 2개씩 있는데 흑갈색. 날개는 연한 갈색 바탕에 흑갈색 줄이 있다. 이듬해 9월에 성숙한다.
구과(毬果)는 솔방울 형태의 방울열매를 말합니다. 솔방울은 전년도 봄에 수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열매 맺기까지 2년 가까이 걸린다는 뜻인데요.
그렇다면 그간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첫해에 암꽃에 도착해 수분에 성공한 수꽃의 꽃가루들은 암술 머리에서 시작해 씨방에 있는 난핵에 다다르는 여행을 해야 합니다. 암술대 안에 꽃가루관을 만들어가며 이동하지요. 거의 1년에 걸친 행진 끝에 이듬해 봄 유전자가 결합하는 수정이 이뤄진 뒤, 가을에 가서야 씨앗이 익는 겁니다.
앞서 암꽃의 길이가 6mm라고 했어요. 이 거리가 짧은 걸까요? 긴 걸까요? 낱개의 꽃가루가 눈에 보일 듯 말 듯 작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도토리가 크게 달리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도 2년에 걸쳐 열매를 맺는답니다.
세계적으로는 100종 넘는 소나무가 있다고 하는데요. 한반도에서는 6천 년 전쯤부터 자라기 시작했답니다. 우리 소나무는 한국과 일본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답니다.
한반도와 일본에서 자생하는 소나무는 줄기가 위로 올라갈수록 붉다. 검은색 곰솔도 있고, 흰색인 백송도 있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소나무 싫다는 사람 못 봤습니다.
그만큼 친숙한 우리 나무입니다.단군이 개국한 때가 5천 년 전이었으니, 그보다 1천 년 앞서 이 땅에 자라기 시작한 소나무와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가까울 수밖에요.
나무 중 으뜸이라는 뜻에서 정목(貞木), 출중목(出衆木), 백장목(百長木), 군자목(君子木)으로 부르기도 했고요.
모든 나무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백목지장(百木之長), 만수지왕(萬樹之王)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강희안은 <화목구품>에서, 유박은 <화목구등품제>에서 소나무에 1등급을 주었어요.
매우 길지만, 소나무와 우리가 얼마나 긴밀히 맺어져 있는지 들어볼까요.
"송홧가루로 음식을 해 먹고, 송순으로 술을 빚어 먹고, 송기로 개피떡을 해 먹고, 솔잎으로 송편을 쪄 먹고, 청솔방울로 장판을 하고, 마른 솔방울로 불씨를 묻고, 송진으로 약재를 삼고, 송진이 묵어서 호박(琥珀)이 되고 밀화(蜜花)가 되면 우리의 귀중한 패물이었다.
섶을 베어 울섶을 하고 관솔을 썼고, 뿌리를 캐서 가구를만들고, 굵은 가지를 쳐서 숯을 구웠고, 연기를 몰아 먹을 만들고, 청솔을 꺾어 도자기를 구웠고, 가옥의 목재는 전부 소나무를 사용했던 까닭에 새집에는 청향이 그윽했고, 몇백 년 후에도 가옥의 기둥이 휘는 법이 없으며, 풍화가 되어도 부드러운 대패 자국이 그대로 살아 건축의 미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린애를 낳으면 대문에 청솔가지를 달았고, 사람이 죽어도 묘 전에는 청솔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청솔은 우리를 저버린 적이 없다."
- 윤오영 <백의와 청송의 변>
이토록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소나무에 신세를 지며 살았지요. 우리나라 지명 중 소나무 송(松)이 들어간 곳이 무려 681개나 된답니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보은 속리의 정이품소나무. 세조가 타고 가던 가마가 가지에 걸린다고 했더니, 가지를 들어올린 공로로 정이품 벼슬을 받았다.
소나무는 문인들은 물론 화가들에게도 사랑받았습니다. 나무의 우두머리인 소나무와 백수의 왕 호랑이, 또는 새 중의 신선 학이 짝을 이뤘고요. 낙락장송과 휘영청 밝은 달도 많이 그렸습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선비의 지조와 의리를 그린 그림으로 국보 제180호입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송백이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는 공자의 말씀이지요. <논어> 자한 편에 나옵니다.
제주에 귀양살이를 하는 추사에게 제자이자 역관인 이상적은 사신을 따라 중국에 다녀올 때면 북경에서 가져온 희귀 도서 등을 선물로 꾸준히 보냅니다. 이에 추사가 고마운 마음으로 이상적에게 보라며 세한도를 그려줍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맨오른쪽은 소나무임이 분명하다. 나머지 세 그루는 잣나무가 아니라 제주 자생 곰솔 혹은 측백나무로 추정된다고 한다.
공자가 언급한 송백(松柏)을 소나무와 잣나무로 번역해 왔고 추사의 그림 속 송백 또한 마찬가지인데요. 소나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잣나무는 측백나무라야 맞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선비가 사랑한 나무>의 저자인 강판권 님은, 중국에서는 측백나무를 귀하게 여겨, 사원이나 궁궐에 많이 심었음을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 그림 속 나무 읽기> 저자인 박상진 님은, 잣나무는 중국 내륙지역에는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 측백나무라고 동일한 주장을 펼칩니다.
추사의 그림 속 맨 오른쪽은 노송, 나머지 세 그루의 나무는 측백나무라고 강판권 님은 보고 있고, 박상진 님은 측백나무이거나 제주에서 자라는 곰솔일 것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무궁무진합니다.
이 때문에 이상희 님의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도 무려 70쪽에 이르는 분량으로 소나무를 다루고 있네요. 많은 부분 저자의 글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이유미 님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 가지>로부터도 도움을 받았어요.
■ 소나무 이야기가 송홧가루로부터 출발했으니, 드물게도 송홧가루를 약간은 유머러스하게 읊은 한시와 윤사월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현대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소나무도 봄빛은 저버리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담황색 꽃을 피웠도다 우습구나 곧은 마음도 때론 흔들려서 남을 위해 금분으로 단장하누나.
장중하고 엄숙하며 고결한 모습 때문에 사랑받는 소나무도 봄을 그냥 보내기에는 어딘가 아쉬워 사람들을 위하여 금가루로 단장하니 웃음이 난다는 거죠? 고려 말, 한 때의 자유분방함을 버리고 무신정권 치하에서 벼슬을 살았던 호쾌한 시인의 풍모가 엿보이는 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앞의 이상희 님 책에서 재인용했습니다.
윤사월
-박목월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온몸을 바쳐 우리 겨레에게 도움을 준 우리 소나무. 그런 소나무가 푸근하고 고맙고, 그래서 본받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