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밭골샌님 Oct 01. 2024

골목길 야생화 59 미국자리공

비난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귀화식물


미국자리공

멕시코의 마야족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

이 세상에 신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그런 동물이 하나 있대요.
이 동물은 백수의 왕, 사자와도 맞서 싸운다고 합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두더지.

두더지는 처음엔 땅 위에 살았고, 눈도 정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자신의 마음만을 들여다보았다는 거예요.
그는 자신이 다른 동물에 비해 큰지 작은지, 강한지 약한지 비교하지도 걱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오로지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당연히 신들의 분노를 사겠죠?
땅속에서만 살라는 형벌이 내려져요.
시력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두더지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계속 자기 마음만을 들여다본답니다.

백수의 왕 사자.
사자는 그 자체가 강해서가 아니라, 다른 동물들이 자신을 약하다고 생각해서 강한 거래요.
사자는 먹잇감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면서 공격한다는데요.
이 순간 표적이 된 동물은 자신을 사자보다 훨씬 작고 약하다고 느끼며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인답니다.
결국 자신을 포기하고 방치하게 되는 거죠.
사자는 그저 이런 동물을 해치워버릴 뿐이랍니다.

두더지는?
사자가 이 짐승에 주의를 기울일 일은 없죠.
하지만 어쩌다 이 둘이 만나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다는 거예요.
사자가 발로 차면 그 발을 할퀴며 달려듭니다.
피가 흐르고 고통스러워도 사자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겁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사자가 눈을 노려보는 데에 대한 두려움은 아예 없겠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 내공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사람 역시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기에 사자와 조우할 경우, 사자가 물러난대요.
사자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지닌 힘을 볼 수 있때문이랍니다.

이상은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라는 책 일부를 요약한 겁니다.
마르코스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트(민족해방전선)이라는 단체의 부사령관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


미국자리공. 붉은 가지와 줄기, 까만 열매로 가을철에 존재감이 뚜렷한 귀화식물이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오늘 주인공은 ‘미국자리공’입니다.
귀화식물로 한 때 토양 산성화의 주범이자 생태계 교란 식물로 맹비난을 받아 보이는 족족 뽑히는 신세였지요.
다행히 오해가 풀려 다시 번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중심자목 자리공과 자리공속의 여러해살이풀.
학명은 Phytolacca americana L.
영어명은 poke-berry, pokeweed, pokeroot.
중국명이자 약재명은 미상륙(美商陸).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입니다.
전국 각지의 평지나 길가, 산에서 자라요.

6.25 때 미군과 함께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1959년 흑산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하고요.
약초로 들여와 농가에서 재배하던 것이 점차 야생 상태로 퍼져나갔다고도 하네요.

원래 우리 땅에서 자라던 자리공이 두 종류 있어요.
중국이 원산인 자리공, 울릉도에 자생하는 섬자리공.
한반도에서 자리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은 이렇게 딱 3종류뿐입니다.



자리공의 이름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리틀에 매달린 고드랫돌. 자리공 열매처럼 고드랫돌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자리공은 고려 고종 때 간행된 의서 <향약구급방>에 자리궁근(者里宮根)으로 수록되어 있답니다. ‘자리궁’이 ‘자리공’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는데요.

돗자리나 화문석을 짜는 기구를 자리틀이라고 합니다. 골풀이나 왕골로 엮은 노끈에 고드랫돌을 매달아 자리를 짜는데요.
자리공 열매들이 자리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고드랫돌과 닮았어요.

이로부터 자리공이라는 이름이 비롯된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기도 하군요.

무처럼 생긴 굵은 뿌리에서 붉은빛이 강한 자주색 줄기가 나옵니다.
지름이 5cm까지 굵게 자라요.
키는 1.5m 정도.
잎은 길이가 10~30cm.
긴 타원 모양으로 양끝은 좁고 가장자리는 밋밋해요.


6월부터 9월 사이에 꽃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붉은 빛이 돌아 눈에 잘 띈다. 사진= 들꽃사랑연구회

꽃은 6~9월에 크림색 또는 붉은빛이 도는 흰색으로 피어요.
긴 꽃대에 꽃자루 달린 꽃이 모여 주렁주렁 이삭처럼 피는 총상(總狀)꽃차례를 이룹니다.
꽃받침조각은 5개.
수술과 암술대는 각각 10개.

열매는 포도와 같은 장과(漿果).
자줏빛 도는 검은색입니다.
열매가 익으면서 아래로 처지는데요.
토종인 자리공과 섬자리공은 처지지 않고 꼿꼿이 섭니다.

예전부터 자리공은 해충을 막는 데 썼답니다.
독성이 강하기 때문이죠.
뿌리에서 짜낸 즙을 냇물에 뿌려 고기를 잡기도 했대요.
열매 또한 씹었다가는 입안이 마비될 정도로 독성이 강해요.
열매로는 자주색 염료를 만든답니다.

한방에선 자리공 뿌리를 상륙(商陸), 미국자리공 뿌리를 미상륙(美商陸)이라고 불러요.
전신 부종, 만성신우신염, 늑막염 등에 효과가 있대요.
종기나 진균에 의한 피부병에 짓찧어 붙이면 낫는답니다.

1990년대, 토양을 산성화 시키는 생태계교란식물이라는 낙인이 찍힌 적 있어요.
등산로 주변이나 공터에서 발견하는 족족 뽑아버렸습니다.
나중에야 산성 토양에도 불구하고 번식을 잘할 뿐, 유해식물은 아님이 밝혀져 누명을 벗게  되었지요.
현재는 토양의 산성도를 알려주는 지표(指標)식물로 소중히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때 박힌 미운털 때문인지 지금도 뿌리째 뽑거나 베어버리는 사람들 많아요.



까맣게 익은 열매를 떨궈내고 남은 꽃대와 꽃받침. 강렬한 붉은색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금 시즌의 미국자리공은 드문드문 흰꽃이 피어 있기도 하고, 녹색 열매와 까만색 열매가 함께 매달려 있기도 합니다.
이미 자식들 떠나보낸 꽃대와 꽃받침이 강렬한 진분홍색으로 남아 꽃보다 더 눈에 띄기도 해요..
한마디로 꽃과 열매의 종합 세트.

저 강렬한 붉음은 제 몫을 다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훈장일까요?

미진한 사랑의 회한으로 가슴에 얼룩진 피멍울일까요?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는 외침으로 듣겠습니다.


■ 가을로 들어섰음을 실감하는 아침저녁 바람이죠?

가을바람은 서쪽에서 부는 하늬바람인데요.
동양학에선 서쪽이 쇠(金)의 기운이 서린 방향으로 봅니다.
색깔로는 흰색, 인간의 도리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옳을 의, 인간의 장기로는 폐와 대장.

동양학의 핵심 중 하나인 음양오행론은 우주의 운행으로부터 자연의 질서, 인간사의 길흉화복, 우리 몸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현상을 하나의 실로 꿰어 설명하려는 오랜 시도입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
동쪽에 청룡(靑龍), 서쪽에 백호(白虎), 남쪽에 주작(朱雀), 북쪽에 현무(玄武).
중앙의 무덤 주인은 땅의 색인 누를 황(黃).
오방색

백호는 서쪽에 그려져 있죠?
명당자리를 따질 때 좌청룡 우백호,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 서쪽입니다.
서울 서대문 이름은 돈의문(敦義門).

■■ 의로움은 또 엄정함을 뜻한다고 지난 '까마중'편에서 언급했어요.
법이나 명령 앞에 가을서리 즉 추상(秋霜)이 붙는 이유죠.
추상같은 법, 서릿발 같은 명령ᆢ.

실제 가을서리는 거의 모든 초목을 스러지게 하지요.
옳을 의(義)가 무섭고 매정한 건 예외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겁니다.

상록수는 예외일까요.
상록수들이 돋보이는 건 다른 초목들이 사라졌기 때문이지만, 그들의 겨울나기는 또 얼마나 힘이 듭니까.

결국 상록수시드는 데는 예외가 아닌 겁니다.


추사(秋史)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바로 그런 자연의 이치를 인간의 일로 해석해 풀어낸 그림이지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송백이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세한도. 자연을 빗대 인간사의 일면을 그려내고 있다.


■■■ 사자와 맞서는 두더지의 용기와 힘은 눈이 없어져도 상관없을 만큼 한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서 나왔어요.

그 힘은 이미 신들의 미움에서 증명되었으니,  사자의 힘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모든 힘의 원천은 결국 얼마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다음의 분들이 갖는 그 엄청난 힘의 근원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부처의 힘.
예수의 힘.
소크라테스의 힘.
공자의 힘.


2024년 10월 2일.

작가의 이전글 골목길 야생화 58 까마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