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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망생 성실장 Apr 26. 2024

240423 - 14번째 진료

또 근거 없이 꺼내는 자연스러운 남편의 뒷담화

"일이 엄청 바빠요. 아니 많아요. 사무실 1과 사무실 2를 오가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할 수는 있어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애들이죠. 매일 밤 12시에 들어가고, 아침은 굶기고, 점심 학교 급식 먹고, 저녁은 치킨, 햄버거, 라면을 돌려 막기하고 있어요. 애들이 외식 싫데요. 치킨 라면 지겹데요. 죄책감이 크지요. 그렇게 살면서도 돈이... 분양권이란 것 무서운지 모르고 사서는 지금 너무 막막하고요. 장사이기에 하루하루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도 너무 괴롭고요. 밤에 잠이 안 와요. 다리가 운동한 것처럼 땅땅하고요."


"하루 종일 긴장해서 그럴 거예요. 일터에서 긴장하면, 집에 와서 이완되면서 쉬어야 하는데, 이완될 시간이 없고, 이완되는 법을 모르는 거죠. 밤에 잠을 자기 쉽게 취침 전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드릴게요. 드시다가도 잠이 안 오면 중간에라도 오시고, 잠을 잘 자면 안 드셔도 됩니다"


신경안정제를 먹으니 신기하게도 잠을 잘 잤다. 문제는 아침에도 못 일어나서 애들 아침에 가는 것도 못 본다는 것인데. 오늘은 그래도 눈은 떴다.


******


진료가 점점 짧아진다.

약을 매일 잘 먹고 있다.

애들이.. 애들에게 죄책감이 들고, 집에 엄마가 없음에, 밥을 제대로 못 챙겨주는 것에 죄책감과 미안함과 걱정이 한가득이어서 그렇지

그 외에는 사실 나쁘지 않다.


애들이 커서 밤 12시 새벽 1-2시까지 일을 할 수도 있고

남편과도 이제 크게 싸우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아니, 남편이 알아서 돈도 더 주고, 고마워하니 싸울 일이 없다.


***


예전에 내가 남자 팬티 라쉬반을 전화 영업으로 판매하고 그랬을 때,

그때의 남편은 석사까지 한 내가

경단녀가 되어, 맥도널드 알바도 탈락하고, 콜센터에서 아웃바운드로 남자 속옷이나 파는 아내를 보며

사실 크게 미안해하지 않았었다.

그때의 남편은 "네가 능력이 그것뿐이니까. 어쩔 수 없지" 마인드였다.


그래 내 능력이 그 정도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논술강사는 주말에 일을 해야 했고, 밤에 일을 해야 했고, 잡지기자는 밤낮주말 구분이 없었고, 마감 때는 정말 집에도 못 오는 직업이었다.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야근 없이, 기본급이 보장되는 직업은 그때 당시 내게 콜센터뿐이었다.


그때 나는 남편이 "내가 능력이 없어서, 아내가 생활비가 부족해서 일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또는 "나도 집안일 육아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1도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라는 생각을 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남편은 능력도 없어서 꼴랑 180만 원 버는  나에게  (꼴랑 180만 원 벌려고 나가지 말라고 말도 못 하면서 ) 자기가 돈을 더 벌고, 본인이야 말로 주말도 밤도 없이 일해서 더 큰돈을 벌어줄 예정이니 미안할 필요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남자들도 무거워하는 상품을 척척 포장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고객응대도 잘하고, 애들이 나서서 엄마가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보니, 미안해한다.


나는 남편이 이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이유는

내가 돈을 벌어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업의 공동 대표로서, 사장이자 실무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대처 인력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나를 대하는 눈빛과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인은 그때는 무지했었고,

지금은 가사노동이 육아가 집안에서 아내의 헌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기에,

일과 가정일을 다 해낸 내게 미안하고 고마운 것이라고 말한다.

남편은 지금 내가 돈을 안 벌고 집안에만 있어도 똑같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내가 직원 2명분의 몫을 확실하게 해냈기에 작년보다 올해 날 더 대접해 준다고 생각한다.


**


하지만 그 원인이 어떻든, 결과적으로 남편과 사업장 1과 사업장 2에서 일을 하면서도 싸우기는커녕 사이는 더 좋아진 것을 보면

약의 효과인지

나 역시 집안보다는 일을 좋아하는 워커홀릭인 것인지 모르겠다.


일단 약은 열심히 먹을 것이다.

몸이 힘들 때 작년에는 소리를 지르고, 애들을 때리고, 쌍욕을 하며 주체를 못 했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애들한테 엄마가 바쁘고 힘들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애들에게 화를 안내는 것을 보면

약의 효과가 분명한 것 같다


( 더불어 남편의 태도 변화도 도움이 된 것이겠지 ㅋㅋ )


**


방금 남편이 지나갔다

또 글 써?라고 한다. 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안 보여줄 것이고, 저이도 굳이 일단은 안 보는 것이 좋을 것이란 것을 아니, 보지 않을 것이다.


많은 이 들이 이 글을 보고, 공감해 주고, 재미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남편이나 가족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을 정도로 조금만(?) 알려지기를 바라는

나는 역시 정신과약을 먹는 환자가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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