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위도 보고, 아래도 보면서 살아.
저기 다리 하나 없는 사람도 사는데, 너도 살아.
저기 암 환자도 사는데 그거 보고 너도 살아.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며, 나는 저들보다 낫다"는 위안을 삶으라는 뜻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저런 말을 들을 때마다. "뭐야. 나는 저들보다 잘났다는 거야? 속이 썩어들어가는 나도 저들과 다를 바 없어. 내가 뭐가 잘났고, 저들이 뭐가 못났다고 비교하면서 위안을 삼으라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등에 나오는 그들은 삶이 힘들어보이지도 않고, 남은 생이 짦음에 속상해할지언정, 오늘을 웃으며, 작은 희망을 잡으며, 밝게 살고 있었기에,
울고있는 나보다 차라리 나아보이기만 했다.
우울증의 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차라리 티비에까지 나오는 그들의 특별한 삶이 부러웠고,
경제적으로 나보다 나아보이는 그들이 부러울지언정
나에게 그 어떤 위안도 되지 않았떤 것이다.
그런데,
위도 보고, 아래도 보라는 말은
다리 하나 없는 사람도 산다는 말은
나보다 못난 이를 보면서 나는 저들보다 나으니 괜찮다는 위안을 삼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냥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의 아픔이 있을지언정,
각자의 선택으로
각자의 방법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리가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방법을 강구해서 살고 있고,
돈이 있으면 있는데로 그 돈을 쓰면서 사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 사는 것이고
돈이 없으면, 병에 걸렸어도 각자 선택한 삶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그들 중에 삶의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어떻게든 찾아낸 삶의 방법을 잡고 있고, 살아 있음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약을 먹고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사실 오늘처럼 약을 하루 빼먹는 날이거나
튜브 하나 붙잡고 거대한 풍랑을 맞이한 것 같이 장사가 힘들게 느껴지는 날이거나
약을 먹어 감정기복은 좀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모든 근본 원인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머리를 때릴 때면
그래서 그냥 다시 다 놓아버릴까 싶을 때면
다시 주변을 본다.
내 눈에 나보자 잘났던지 못났던지 상관없이
모두가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서 살고 있는데
내가 뭐가 못나서 방법을 못 찾는가.
나는 그냥 우울해하면서도,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하고 싶은 일이 아직 있으니, 어떻게든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강구한 나의 삶의 방식은
"그냥 오늘 하루를 사는 것" 이다.
별 것 없다. "일단 그냥 오늘 하루 산다" 라고 아침마다 되뇌이는 것이다.
뭐 오늘 별거 있던 없던, 기대도 하지 말고 낙담도 하지 말고, 눈 앞에 있는 책임과 의무를 하면서,
그냥 오늘 하루 일단 숨을 쉬는 것이다.
그게 내가 찾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울증을 안고 100살까지 한 번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아닌가.
100살쯤 되었을 때, 만성 우울증 환자가 100살까지 사는 법 이란 책을 쓸 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던
애들이 아직 어리고, 애들이 50살 될때까지는 부모노릇 할 것이 많이 남아 있고,
남편이 그토록 원하는 서민갑부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필요하다하고
아직 너무나 건강하고 젊은 부모님이 그렇게 내가 잘 살기를 원하는데
나는
그저
우울증을 안고도 살아나가는 방법을 잊지 않고 되뇌이며, 오늘 하루도 일단 숨쉬는 것을 택할 수 밖에.
"그냥 일단 오늘을 시작하고, 사는 것" 뭐 다른 방법이 있나.
죽고 싶다고 함부로 죽으면 안되는 인생인 걸
물론 왜 안되는가 죽고 싶으면 죽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가시들이 계속 찌르긴 하지만.
모든 우울증 환자가 그렇듯이
약을 먹으며, 그런 생각을 못 본 척 하며
"오늘 하루 일단 살고 본다" 큰 소리로 외치는 거지
그렇게 일단 오늘도 지금도 "내가 찾아낸 우울증 환자의 삶의 방식"대로 나는 일단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