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시원한 물을 먹는 척, 정신과 약을 먹는다.
우울증 약이 4알
알록 달록 약을 먹으면
오늘 하루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지난 달, 갑작스런 단약으로, 가슴이 답답해지고, 나른해지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증상에 힘들었던 때를 기억하며, 원인을 없앨 수 없다면 약으로 버텨야 한다고 다짐했었다.
약 덕분인지. 이번 설에는 화르륵 불 같은 화도 없었다.
사실 위기의 순간이 있긴 했다. 잔소리를 들을 때.
양쪽 집, 특히 시어머니께서
남편과 나 둘 다 건강을 생각해야 한다며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잔소리를 시작하셨다.
시아버님께서 많이 편찮으시기에, 더더욱 중년이 된 아들 내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신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건강을 챙기면서, 밥도 제때 먹고, 운동도 하면서 사는 삶이 너무나 사치인 지금
살을 빼라. 좋은 것을 먹어라. 밥 먹으면서 일해라 하는 말들이 잔소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머님 아들이!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합니다.
매일 매일 새벽 2시까지 일을 해요.
밥 때를 맞출 수가 없어요. 강의에 작업에 상담에 직원들 부리는 것 까지
어머님 아들이! 쉴 틈이 없는 환경입니다.
저요?
저도 똑같이 일합니다. 일년에 하루도 못 쉽니다.
전화기 3개를 들고 다니면서 쉴 세없이 상담에 영업에 고객 사후 관리에 행정 서류 업무까지
나도!
어머님 아들 덕분에 일복이 터졌다구요!
내가 밥이라도 하고, 설거지라도 하려면, 돈 안되는 것으로 시간 버리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예요!"
라고
예전에는 소리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리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아들이 아프면 어떡할거냐. 병수발 들거냐 하는 말에
"내가 먼저 아프면 되지요" 라고 했다가 살짝 등짝을 맞았을 뿐
사실 어머님은 본인 자식들에게는 장난으로라도 등짝을 때리지는 않는 분인데
나에게만 이번이 두번째였다. 아프지는 않은 그냥 말 조심하라는 손짓이었지만,
친정 엄마가 아니라 시어머니여서인지 기분이 퍽 나빴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르륵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허허 웃었다.
남편이 본인 엄마에게 자기가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있고, 그 모든 행위에 내가 동반되는지 말해주면 싶었다.
그래서 아무리 며느리에게 말해봤자 소용 없음을 본인 어머니를 설득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남편은 갑자기 우리가 빚을 얼마나 갚았는지, 사업이 얼마나 잘 되는지 뜬금없이 자랑하며
바쁘니까 돈을 버는 거라며 포인트를 바꿔버렸다.
어머니는 결국 여자가! 살림을 잘 해서! 남편 건강관리까지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데
이 멍청한 남편은 말 그대로 밥 챙겨먹고 다니라는 말인 줄 알고 그런 것이다.
나는 정말 한탄을 하고 싶었다.
차라리 직장 다니며 살림할 때는 밥이라도 했었고, 주말에는 쉬기라도 했지
남편이랑 일하면서
밥할 시간도 없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산다고
나는 정말 이렇게 살기 싫다고, 그래서 당뇨 걸린 것도, 정신과 약을 먹는 것도 싫다고 한탄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해봤자
능력없는 내 탓을 할 뿐인
시짜 임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을 술먹으면서 풀거나. 소리지르면서 풀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푸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신과약의 결과라고 믿는다.
내가 사실 2-3개월 단기 프로젝트는 성공했어도
6개월 이상 장기 프로젝트를 성공한 것은
결혼과 육아가 유일한데
생각해보니 거진 1년간 정신과약을 잘 먹고 있는 것이 그 다음으로 유일한 것 인 것 같다.
그만큼 나도 내 정신건강이 약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나보다 하는 것이다.
뭐......
뭐든 해결책이 있으면 됐다.
정신과 약이 뭐! 비타민이다 생각하고 먹으면 되는 거지!
암튼
시댁식구들이 내가 힘든삶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는데
그래봤자
정신병자라고 할 테니
모르는게 낫겠지 싶다.
암튼 이번 설에도 시댁에서는 컵 하나 안 씻고,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코골고 낮잠자면서 잘 버텼다.
아들만 설거지 시키면,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다 나서서 10분이면 치울 일을
아들 안 시키느라 사먹고, 혼자 치우고 하는 시어머니 고집도 참 대단하고
그런 시어머니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그집 아들 딸도 대단하다 싶다.
그리고 이렇게 뒷담화나 하면서, 가만히 있는 나도 참 못 된 며느리고.
암튼
정신과 약을 정말 잘 먹고 있습니다.
상처가 나아지는 것은 모르겠지만
더 커지지 않는 것은 이번 설에 확인을 했네요.
언젠가는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좀 쉬고,
주 2회 운동가고, 하루 한끼라도 제때 챙겨먹을 수 있는 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버는 날이
꼭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