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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망생 성실장 Dec 23. 2023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가까이하기 싫다

제목이 너무 어그로인가.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매우 좋아했다. 그 문장 하나하나 참으로 멋있었다. 중2병 같으면서도, 지적인 것 같으면서도, 껍데기인 그 책이 너무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감히 살 자신이 없는 정말 정말 예쁜 철제 상자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 같다. 


마트나 다이소에 가면

선물을 담는 예쁜 종이 상자, 쇼핑백, 철로 된 상자 같은 것들

알맹이는 없지만, 너무 예뻐서 구매하고 싶고, 거기다가 뭐라도 담고 싶은 아름다움

하지만, 알맹이도 없고, 넣을 것도 없는데

몇만 원이나 하는 상자 박스를 살 자신이 없어서 

그냥 결국은 안 사는 


그런 아름다움을 나는 하루키에게 느낀 것 같다. 


큰애를 임신하고, 돈이 너무 없고, 남편이 애들이 보면 안 되는 책들을 버리라고 했을 때,

나는 하루키부터 버렸었다.

나를 닮을 것이 뻔한 내 딸이, 중학생 때 하루키를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한 25살쯤에나 허락하고 싶은 책이었다. 수많은 섹스신이 문제가 아니라, 재즈 음악, 위스키, 커피, 치즈케이크 등 겉멋만 들 것 같아서......


( 사실 나는 그때 생활비가 너무 없어서 몇십 권의 책들을 버리고, 50만 원인가 70만 원인가를 벌어서 한 달을 살아서 좋아했지만. 지금은 진짜 후회한다... 다시 그 책들을 모을 수가 없다 ㅠㅠ 그리고 그렇게 쉽게 내 꿈을 버리다니.. 결혼이 엄마가 뭐라고.... 왜 그랬을 까. 나 나름 재능 있었는데...... ) 


암튼


그런 나날을 보내고 13년째 나는 책 한 권 읽지 않는 아줌마가 되었다. 책을 읽을 시간도 체력도 없었다. 나 스스로가 참 한심했고, 무식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지난 주말, 큰애가 여행을 가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엄밀히 말하면 숙제지만, 암튼 여행 가서도 해야 할 공부를 하다니!!

우리 가족은 큰애가 수학 숙제를 할 동안 책을 읽기로 했다. 


남편은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를, 둘째는 흔한 남매 만화책을, 나는 집에 어찌 된 일인지 1권 있던 하루키 책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있어서 그 책을 가져갔다. 


와... 10장을 못 읽겠더라,

차라리 같이 가져간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가 더 재미있었다 


와... 내가 이런 사람이 되다니... 좀 나한테 실망했고, 안도했다. 사실 나이 45살이면 하루키의 젊은 시대의 책은 읽기 힘든 게 정상일 것 같아서  ㅋㅋㅋ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도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겠지만. 아직도 하루키에 빠져 있는 사람이랑은 친구는 이제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안녕.. 내 스무 살.

이제 나는 45살이거든...

안녕... 내 젊은 날

이제 난 결코 젊은이는 아니거든 

이제 내 딸들이 젊은이가 될 거야


이제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늙은이야 

내 딸이 하루키 1권만 이라도 읽고, 언젠가 나랑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 


근데 딸아 나랑 친구 안 해도 되니, 훨훨 날아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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