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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소리 Oct 21. 2023

그녀의 아지트

  H는 어디를 가나 늘 '아지트'를 만드는 꿈을 꾼다. 최근 제주로 이주하기 전까지 2년간 가족이 사는 아파트의 옆 동에 아지트를 만들어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거주한 적도 있다. 유별난 아내의 성향을 이해한 남편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매일 퇴근길에 가족이 사는 집에 들러서 남편이 준비한 저녁을 함께 먹고 다시 아지트로 귀가하는 희한한 생활을 그녀의 가족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살았다. 그들의 별거 소식을 전해 들은 남편의 친구들은 아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별거하는 그들의 실험적인 라이프 스타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그녀의 친구들도 앞다투어 아지트에 방문해서는 그들 부부가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들의 로망이라며 부러움을 집안 가득 쏟아내고들 돌아갔다.

         

  은퇴하고 주부로 살고 있던 남편은 그녀가 출근하고 없는 낮에 아지트에 와서 방 정리와 청소를 해주고 나서는 조용히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 타임을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가끔은 아지트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 그럴 때는 약간의 설렘이 느껴지기도 했던 걸 떠올리면서 그곳이 그들 두 사람에게 좋은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고 회상한다.          


   그녀가 꿈꾸는 아지트의 모습은 나름의 조건이 있다. 커다란 창이 있고, 창 밖에는 나무, 풀, 꽃 같은 자연의 싱그러움이 보여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지는, 그야말로 멍 때리기 좋은 그런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쓰며, 그녀가 좋아하는 핸드메이드 작업까지 할 수 있다면? 원할 때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주어진다면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그런 장소를 만들어서 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그녀가 아지트를 생각할 때면 늘 어릴 때 살던 시골집 그녀의 방이 떠오른다. 나무 창틀에 창호지를 발라놓은 창문을 열면 지붕까지 타고 올라간 포도나무 넝쿨 아래로 접시꽃이며 봉숭아꽃, 무화과나무와 석류나무 열매가 계절마다 익어가는 아담한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 옆에 놓인 나무 책상에 기대어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책상에 앉아서 그녀는 밤이 새도록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일기를 쓰거나 의식의 흐름대로 낙서를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그녀가 가진 감성의 9할 이상은 분명 그때 키워졌으리라. 갱년기를 맞은 이 나이에도 늦은 밤까지 깨어있는 습성이 남아있는 것은 고집스러운 그 시절의 흔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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