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해가 진다고 한다. 그 말은 가장 동쪽에 있다면 그곳에서 밝은 하루를 처음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구는 둥글고 그 어느 곳도 동쪽이 될 수 있지만, 인간 사회는 나라를 구분 지어 놓았기 때문에 동서남북의 끝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에도 최동단에 해당하는 역이 있다. 그런데 최북단 역인 왓카나이역과 달리 최동단 역은 두 역이 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한 최동단 역. 왜 그런 이름들이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최동단 유인역인 네무로역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안내판.
일본 최동단 노선은 네무로본선으로, 이 노선의 이름이 붙은 네무로 지역이 노선의 끝이자 최동단 마을이다. 그래서 네무로역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최동단이라는 이미지를 알리고 있다. 그런데, 네무로역에는 그냥 최동단 역이라는 말이 없고, 최동단 유인 역이라는 표시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 최동단 역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실질적인 최동단역인 히가시네무로역에 위치한 최동단 푯말.
그것은 네무로역의 다음 역인 히가시네무로역에서 찾을 수 있다. 네무로역을 출발한 열차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동쪽으로 잠시 이동을 한 후,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하필 거기에 역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역이 바로 히가시네무로역. 히가시(東)는 우리식 표현으로는 동쪽이라는 의미로, 네무로역보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히가시네무로역은 1선 1승강장으로 역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만 갖춘 아주 작은 역이다. 이 역은 상주하는 인원도 없는 무인 역이다. 여기를 지키고 있는 것은 승강장에 위치한 최동단 역이라는 푯말(좌측)과, 승강장에서 빠져나오면 볼 수 있는 푯말(우측) 뿐이다. 그래서 네무로역은 항상 역무원이 상주하고 있는 유인 역이라는 의미에서는 최동단이 맞다.
최동단 노선인 네무로본선의 마지막 역은 네무로역이다.
히가시네무로역보다 좀 더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네무로역. 이 역이 실질적으로 최동단 노선의 마지막 역이다. 네무로역은 작은 규모지만 역사도 갖추고 있는데, 열차가 도착하거나 출발할 때 즈음에는 사람들로 북적일 정도로 유동인구도 제법 되는 역이다.
최동단역인 히가시네무로역은 마지막 역이 아니라 중간 역이다.
하지만 히가시네무로역은 녹이 슬어서 손만 가져다 대더라도 구멍이 날 것만 같은 허름한 역명판이 전부다. 이곳에는 대합실도 하나 없을 정도로 진짜 승강장 하나만 딱 갖추고 있는 간이역이다. 최동단이라는 상징성이 없다면 이 역은 당장이라도 폐역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실제로 히가시네무로역 다음 역이었던 하나사키역은 폐역되어서, 역명판을 보면 그다음 역인 니시와다역으로 바꾼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최동단 노선은 이용 승객이 적어서 소리 소문 없이 하나 둘 지도 상에서 지워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일까? 최동단이라는 푯말이 마지막까지 역을 지키려고 하는 호위병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무로본선을 다니는 열차. 이곳에는 모두 1량 편성의 원맨 열차만 운행 중이다.
네무로본선은 최북단 노선인 소야본선과 달리 특급열차가 노선의 마지막인 네무로역까지 운행하지 않는다. 특급열차는 현재 네무로역을 오가는 열차가 운행하는 마지막 역인 구시로역에서 더 이상 동쪽으로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이 1량 편성의 원맨 열차만 이 구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비록 원맨 열차라고는 하지만 이 열차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에게는 이 열차가 다른 교통수단보다도 더 편리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최동단은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우리도 매일같이 보는 우리 지역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듯, 매일 볼 수밖에 없는 최동단 푯말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표지판에 불과하다.
마지막 역인 네무로역이 최동단 역이 될 수 없었던 이유.
네무로본선은 노선이 끝나가는 히가시네무로역에서 네무로역 구간을 지날 때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마치 히가시네무로역을 거쳐가기 위해서 일부러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최동단이라는 이름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일본에는 이렇게 최극단에 대한 의미를 좀 더 세세하게 구분 짓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4개의 주요 섬에서는 각 섬마다 또 동서남북을 나누어서 '어느 섬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역'이라고 표현하는 등 의미 부여에 신경 쓰고 있다. 최극단에 위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접근하기 쉽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에 비해 교통편도 적고 유동인구도 많지가 않다.
특히 철도는 유동인구가 적으면 운영 하는데 있어서 애로사항이 많다. 이런 위기를 극복해보고자 '유인 역으로써 최동단 역', '일본 전체에서 최동단 역' 등으로 다른 지역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철도 사랑으로 유명한 일본에서는 이렇게 작은 의미라도 기념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최동단 역이라는 의미 부여는 외지인 유입을 통한 네무로본선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철도는 이어지지 않지만, 이 방향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최동단 유인 역은 네무로역의 차지다.
동쪽으로 잘 오다가 돌연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네무로본선. 물론 그렇게 해서 나오는 역은 네무로역 한 역에 불과하지만, 이 노선이 더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일본 최동단 역은 히가시네무로역, 일본 최동단 유인 역은 네무로역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네무로역에서 더 나아가는 방향은 서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루에 겨우 6편의 열차가 운행 중인 네무로역.
이렇게 독특하게 노선이 끝나는 최동단 노선의 마지막 역인 네무로역. 그런데 이 역을 오가는 열차는 하루에 겨우 6편뿐이다. 그래서일까? 네무로역은 도착하는 열차와 출발하는 열차의 시간이 모두 담겨있다. 열차 시간표를 잘 보면 네무로역을 출발하는 첫차와 네무로역에 도착하는 막차를 제외하고는 네무로역에 머무는 시간이 20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다.
네무로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모두 특급열차가 있는 구시로역까지만 운행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출발 열차 아래에 적힌 시간표는 삿포로로 가는 특급열차 시간표로, 구시로역에서 여유 있게 환승할 수 있도록 네무로역 출발 시간을 조절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특급열차가 몇 명 안 되는 승객을 위해 네무로역까지 오는 비효율적인 운행을 막고, 네무로본선을 운행하는 보통열차의 통행에도 지장을 주지 않음으로써 독립적인 운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는 열차 운행 빈도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작은 역에서도 열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뺏기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한 때 가장 빠르고 편리한 열차였던 새마을호. 이 열차도 이렇게 역할 분담을 잘했다면 과연 무궁화호와 같은 운행시간을 가진 일명 '새궁화'라는 열차가 나왔을까? 그렇게 속도에 대한 장점을 잃어버린 새마을호는 무궁화호와 고속철도 사이에 끼여서 자신의 위치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없어지는 비극을 맞이했다. (ITX-새마을이라고 나오긴 했지만, 이것은 새마을호의 후신이라고 보기엔 공통점이 전혀 없다.)
그런데 지금 고속철도 역시 굳이 운행을 하지 않아도 될 보통열차(일본에서는 재래선이라고 부름) 구간도 버젓이 달림으로써 잘 다니고 있던 무궁화호 마저 씨를 말려버리려 하고 있다. 열차의 특성에 맞게 운영되어야 승객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고, 열차도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운행할 수 있는데, 너무 중구난방으로 다니는 것 같아서 우려스럽다.